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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나잇 인 소호 (Last Night in Soho, 2021)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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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7 / 10

 

장르는 공포였는데, 왜인지 신성의 편린을 엿본듯 하다

 

 

지금 극장가의 영화는 심상치 않다. 네이버에서 모를 최초 검색하기 시작하면 모비우스가 뜨긴 하지만. 과연 그정도의 대우를 받을 만큼의 영화인가? 솔직히 모피어스, 모나리자, 모모가 있는데 모비우스가 먼저 검색어에 뜬다, 이것은 심각한 도덕적 결함이 아닐 수 없다. 더러운 네이버 놈들. 정치에 얽혀 검색어 조작으로 한참 욕먹은게 5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3년상을 끝내자마자 선산 팔아버리는 마냥 검색어를 쥐락 펴락해? 

물론 관심사를 반영했다는 말이 있긴한데, 모로실 부터 대체 알지 못하는 어휘다.
클린-다음의 위엄을 보자. 모다모다 샴푸는 뭐지?

 

다시 돌아와서, 이 영화 관람적 결의를 다져줄만한 영화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딘가 돈을 쓰면서 반은 의무감으로 보는 듯한 감각, 동시에 구매라는 거대한 의사결정에 흔들림이 없어야할 것.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따져봤을때.. 답은 하나다. 퀸스 갬빗의 그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 조조 래빗의 그 배우, 토마신 맥켄지, 그 모두를 만나볼 수 있는 약속된 예언의 땅.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영화 관람가의 작은 리뷰, 작은 기록거리가 아니다. 거룩함, 경건함, 그 어딘가에 예언된 영화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모두가 성지 순례에 대해 각각의 기록을 남길 순 있지만, 결국 그 성지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지 않던가. 이 글이 아무리 작고 조회 수가 적고 흩어 부스러질 지라도, 영화의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안야, 토마신. 

 

작게 기록 남겨본다.

 

 

 

1.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던 시대의 뒷 모습

살짝 더워보이긴 하지만, 런던의 날씨는 쉽지 않다. 4월 27도를 찍는 한국과는 다르지.

샌디의 매력은 두 가지 의문을 안겨다 준다. 첫 번째로 저런 사람도 성공이라는 것은 쉽지 않은 거였어다는 한탄과 같은 질문. 두번째는 그렇다면 대체 누가 살아남아 성공하는 걸까.

 

저 1960년대의 런던은 감이 오지 않는다. 연상의 실마리가 없다.

한국의 1960년대는 대체 어떤 모습이었냐면, 어릴적 사회책에서나마 경공업을 아직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전후 회복에 급급했던 나라 아니던가. 그런데 하물며 그 시대에서 한참 뒤에 응애하고 나타난 사람에게야. 1960년대에 지구 멀리 바다를 건너 부흥기를 맞이하고, 그 시대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숨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들. 그 말의 무게나 건물, 거리의 무게를 잇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엘리도 작중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오롯히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로 채우고, 그렇게 할머니의 이야기와 취향을 많이 접하게 되며 얻게 된 1960년대의 감각들. 엘리의 본질은 결국 좋은 점이 편집된 1960년대, 그리고 음울함이 편집된 1990년대의 결합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국가적, 시대적 경험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모호함을, 앨리의 한 마디가 정리하여 다듬어 준다.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미국의 대공황이 세계의 침체를 안겨준 그 다음에서도, '아직 런던이 세계의 중심인' 시대. 1960년대의 런던은, 디자인 스쿨이 유지되는 런던의 모습은 그런 감각이다. 황금기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리. 시대가 몇번 바뀌는 와중에도 예술이라는 개념이 거리에 남아 스며든 장소. 이 머나먼 이방인의 감각에서, 소호라는 명칭은 생소함에도 런던의 디자인 스쿨이 계승된 거리라는 이름은 강렬하다. 대충 종로, 대충 대학로 같은 느낌이겠거니.

 

되려 개인적으로 가장 놀랐던 것은, 아무리 게르만의 도시 런던이라 하지만 이거 너무 미국적인 영화가 아닌가 싶은 대목들이었다. 성적인 피해를 겪더라도 조금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기 위한 암약들. 그리고 피폐해진 여성들의 마지막 모습들과 한껏 이용해먹은 남자들. 어딘가 브로드웨이의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을 담아내기 좋은 클리셰 아니던가. 너가 뭐가 특별한데, 성공하기 위해선 다들 이렇게 해. 그리고 그 결말은 이렇게 해의 틀을 멤돌던 그 비참한 말로였다. 

 

예전 시대에 대한 동경으로 다가선 엘리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자, 마냥 쉽지 않다. 누군가가 입는 모습을 상상하며 스타일을 담아낸 엘리의 작품은, 한 순간에 그 의미가 바뀌어 간다. 1960년대의 화려한 런던 거리를 상징하는 유망한 연예인의 의상. 그 다음 이야기에서는 결국 실패를 뼈저리게 느끼고 성적인 착취와 백댄서만을 오가는 어느 이름이 잊혀져 가는 이의 의상. 알렉샌드라에서 샌디, 다시 샌디에서 무수한 이름들을 읊조리는 샌디의 모습을 보자니, 어딘가 샌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하쿠의 경고가 떠오르는 듯하다. 이름만은 잊어서는 안돼. 

 

 

 

2. 솔직히, 신을 믿게 된다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영화가 주는 음울한 뒷 그림자는 여기서 매듭 지어도 충분하다. 서사는 사실 여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과연 황금기였나, 아니다. 그 여느 세상에건 비합리와 불공정은 숨어있다. 사실 미투 운동이 힘을 얻은 배경은 통신 기술의 발달, 대중이 예전에는 접근하지 못했던 정보에 접근 가능하게 된 것임을 자각하고, 우리는 기술의 발전에 근거하여 더 나아져 가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인지하자. 황금기는 과거도, 지금도 아닌 내일이다. 이것이 바로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소결론인 것이다. 1960년대와 과거의 황금기는 사실 더 처참했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불태우고 미래를 봐야하며, 그 배경에는 판자로 막아놓은 원념과 시체들을 딛고 일어서 학교와 같은 시스템을 남겨야만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도대체 대결론,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는 무엇인가?

부동산을 사자? 나이가 50이 넘어가는 순간 결국 남는 것은 부동산이다? 원래 젊음과 미모, 머리의 비상함은 인생에 있어 한 순간이라 하지 않던가. 그 무구한 살해의 기간을 견뎌낸 런던 생존 전문가 웬디의 결론을 떠올려보자. 답은 부동산이다. 특히 본 작에서 그 가이드는 보다 세심하다. 옛 거리의 집이라고 모두 같은 집은 안니다. 살 때 사더라도 확실한 것은 대학가 근처이다. 귀신이 나타나요, 밤에 정신 못차리고 도주해요 할 지언정 지속적으로 새로운 새입자가 들어온다니. 이게 바로 약속의 땅 아니던가?

 

아니다. 약속의 땅은 영화의 결론이 될 수 없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정답은, 이 시대는 다음 세 명의 배우가 이끌어 갈 것이라는 결론이다.

아나 디 아르마스, 안야 테일러 조이, 토마신 멕켄지. 물론 아나 디 아르마스는 이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지막 007을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이다. 

우수, 꽃무늬, 할머니와 20대의 조합. 쉽지 않지만 다음 세대의 격을 예측할 수 있다.

본작의 주연인 토마신 멕켄지를  짧게 기록하고 넘어가면.. 어딘가 닮았다. 누구와? 티모시 살라메와.

티모시 살라메는 정작 미국 배우인데 영국스러운 느낌이 난다면, 이 배우는 정작 뉴질랜드 배우인데 영국스러운 느낌이 난다. 대체 뭐지. 굳이 외형상의 닮은 점을 찾자면 턱과 하관, 눈의 방향성이 어딘가 비슷한 점을 연상시키지만 넘어가자.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침내 이 영화를 볼 이유가 자명해진 것이다. 식상할 수 있는 서사의 뼈대와 화려한 1960년대의 묘사. 그 모두가 영화를 구매하고 보기까지 핵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면, 때로는 배우가 정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배우들의 매력만큼은 잘 드러내고 있다.

생각보다 금발도 어울리는거 같깉 한데. 금발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3. 결론.

 

관사는 쉽지 않다. 왜 The Last Night In Soho가 아닌지 한참 고민 했노라 고백한다.

 

어쩌면 일반적인 밤들을 지칭하는 것인가? 생각도 들었는데. 작중 엘리는 한번만 악몽을 꾼게 아니었고, 샌디의 험난했던 밤들도 단 한번, 딱 한 번의 바로 '그' 밤은 또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래도 last 이면 The Last 인게 타당하지 않나?

문화가 주는 언어의 장벽은 관사에서 드러난다. 알아두자. 또 기억하자. 예전에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준 독일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너네 나라에서는 관사를 안쓰니? 아니. 어. 쓰긴 쓰는데, 쉽지 않은 대답이었다. 너네 나라에서는 포크를 쓰지 않니? 너네 나라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수건 빤 물인 것 마냥 극혐하니? 너네 나라에서는 스타우트의 적정 알코올 도수는 10도 이상이니? 와 같은 말처럼, 어딘가 조심스러워야 했고 민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짧게 짚고 가자. 우리는 관사를 쓰되 소호의 '그' 밤이라고 강조하는게 보편화 되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 날 밤, 그 밤, 그 사람, 그 장소. 그 시각, 그 시대. 모두 옛날 어딘가의 언어를 담습한 듯 묘한 느낌이다. 매우 작위적으로 보인다. 논문이나 학구적, 정보 제공의 글은 어떻냐고? '그' 보다는 좀 더 앵커가 정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위의 도표에 따르면" 같이 서술하지, "그 차트는 보여준다. 우리의 피 땀 눈물을." 같이 말하지는 않잖아. 혹은 "그 시대는 더러운 시대였다." 와 같은 표현은 너무 문어체라고 평가하는 반면, "아버지가 힘내서 일궈낸 시대는, 아버지의 성품과는 무관하게 더러운 시대였다." 와 같이 관사와 무관한 서술 표현이 좀 더 가독성이 좋다.

다시 말해 정관사는 한국어의 체계에서 매우 어색해져있고, 전치사 또는 수식어구를 통한 구체적인 대상 묘사가 보편화 되었음을 자각해야한다. 여기에 더해, 동일한 지문 내에서도 앞의 개념을 받는게 아닌 '위의 도표'와 같이 문맥상의 위치를 전치사로 짚어내는, 추상화 또는 이미지로 소통함이 당연화 된 것이 한국의 언어 문화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그'를 생략하는게 동북아의 트렌드야 라고 말하기엔 중국어를 모르고(일본어는 비슷하다고 들었고). 알고보니 인종차별주의자 였나 하는 일렁임에 재빨리 공정성을 부여해보면, 인종 차별적인 발언은 아니었다. 순수한 학구적 호기심과 작은 불평정도 였을 것이다. 그 친구가 팀 레포트에서 나의 작문 부분을 많이 수정해주었음이 근거로서 하나. 그리고 나는 구글 번역기를 한 번 거쳤음 둘을 고백한다. 구글 보다는 역시 독일인의 영어 첨삭이 정확한 법이지. 백년 즘 뒤에는 게르만 연방 공화국이 생기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우크라이나는 어디로 가? 쉽지 않다.

 

 

 

영화관람의 정체기가 왔을 때, 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고민하던 중 이 영화를 만났다.

그렇기에, 영화적 허구, 영화가 가져다 주는 화면의 구성, 그리고 영화속에 녹아날 수 있는 음악의 강점과 배우에 대한 몰입까지. 이 영화는  내게 영화란... 숙제가 아닌, 그 모든 종합적인 예술의 실험실이라는 정의를 새겨주었다. 

 

왜 실험실인가는, 당연히 7점으로 기록남길 영화이기 때문이다. 10점으로 남길 영화였으면 예술의 본질이다 정도로 남겼겠지만. 아직 내게는 서사의 빈 자리가 너무나 크다. 참신한 이야기, 혹은 깊이 있는 이야기. 혹은 글로 담아낼 수 없을 무언가를 표정과 화면에서 보다 더 밀도 있게 담아낸다면. 모든 영화가 그런 고민을 담고 나온다면 실험실이 아닌 창조의 요람 정도 되겠지.

 

이번 영화의 서사는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 힘을 뺀 느낌이다. 타임 루프는 아닌데. 영국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정도 되려나? 아니면 고스트 바둑왕 버전의 레지던트 이블? 점차 깊게 얽메이게 되면서 현실과의 충돌. 드러난 충격적인 진실. 부상입은 남자와 살아남는 여자. 밀라 요보비치. 샌디가 러시아계였다면 스파이로 타당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7점 아래로 주기에는 배우들의 매력에 사로잡힐 듯 하고, 7점 보다 위로 두기엔 어딘가 이야기의 마력이 부족한 느낌이다.

런던은 내 기억속에 7점 같은 도시였다. 행운을 기약해야 하고, 맥도날드가 맛있었으며, 런던 아이가 핵심인 도시.

이 영화도 그 정도 기억으로 기록을 마무리 짓는다. 이래저래 말해도, 결국 그 다음의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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