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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1994)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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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8 / 10

 

20대가 끝나기 전 봐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영화 제목이 귀에 감겨왔다.

분명 누군가에게 또 전해들었던 영화거나, 혹은 그만큼 한 시대의 관객들이 사랑했기에 여운이 남아 귀에 닿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날도 더워지며 어딘가 홍콩 분위기의 영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우연히 떠오른 제목의 영화가 이렇게 또 긴 여운을 남길 줄은 몰랐지.

때마침 5월인게, 극의 어느 시점과 이어져 영화를 마주한 느낌이다.

 

서사나 극의 전개에 조금 더 집중하는 편이다 보니, 이런 영화는 또 어떻게 정리해 머릿속에 남길지 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작게 쥐어 짜서 남겨봐야지.

 

 

1. "지금부터 시작해 바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했다" 를 시작하기까지

 

저 독특한 목의 각도. 키가 크면 저런 구도가 가능하구나. 날개뼈의 돌출각이 인상적이다

짧게 첫 이야기로 글을 풀어보면, 특유의 장면과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술에 취한 듯 뿌옇게 흐려지며 추격의 이미지만 선선히 보여주고 음악을 통해 상황을 묘사하는 그런 장면들이, 앞서 보았던 화양연화의 여느 장면과 겹쳐 보였달까. 

 

물론 이 영화가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2000) 보단 6여년 빨리 나왔고, 마약 밀매나 인도인 노동자와 같은 복잡한 사회상을 그려낸 차이는 있다. 애초에 화양연화는 각각 결혼한 이들의 묘한 긴장감과 닿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면, 여기는 좀 더 풋풋하잖아. 극 중 경찰 223번 역의 나이는 불과 24세 였으니, 사랑을 파헤쳐 보는 시선의 깊이가 사뭇 다름이 느껴진다.

 

 

파인애플 통조림의 시럽은 마셔도 되는걸까? 그렇다면 치킨 무 국물은 마셔도 되나? 사실 저건 여명 808 아닐까?

 

그러다보니, 5년을 사귄 여자친구와의 갑작스런 농담 같은 이별에, 딱 1달을 기다려보자 하며 5월 1일자로 유통기한이 끝나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모으는 223의 모습은 좀 더 몰입이 된다. 그리곤 저 위의 바에서, '지금부터 시작해 바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정했다' 다짐하는 모습이란. 다짐이 무색하다 싶다가도, 1달여 파인애플 통조림 수집 했으면 저럴만 하지 싶기도 하고.

제 정신이 아니구나 말하기 앞서, 그 너머의 씁쓸하고 자조어린 치기가 눈에 선선히 보이는 듯 하다. 나는 어느 정도의 사람일까를 짚어보는 가장 명확한 길은, 결국 타인에게 부딪히는 순간 아닐까. 처음 마주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며, 본인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끊임 없이 되묻는 것이다. 첫 질문인 파인애플 좋아하세요에 대해, 당신이 궁금하다는 주석은 어딘가 자신에게 되새기는 주문과 같이 들린다.

 

마약 밀매상과 경찰의 이 마주함은, 이렇게 스쳐가는 정도로 글도 마무리 짓는다.

사실 더 마음에 닿던 건 그 다음의 이야기 였으니까. 그리고 미쟝센에 대한 찬사는 한 문장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 추격 장면의 연속과 사건이 밀도 있게 배치되며, 사랑의 유통기한이 만 년이면 좋겠다는 223의 덧 없는 말과 한 순간에 사랑하고 다시 이별하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 대한 반복 되는 질문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대비되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달까.

 

 

2. 집이라는 공간을 다시 이름 붙이는 방법

현대적 시각에서 우렁각시는 사실 범죄다. 위 사진도 범죄현장 조사가 아닌, 범죄현장 그 자체다..

앞선 이야기가 사랑의 시간에 대한 유효성을 강조하며 물어보았다면, 두번째 이야기는 장소에 대해 묻는다.

하필 그 장소는, 여자친구의 직업이 공간적으로 멀리 떠나 다니는 스튜어디스인 점과 더불어 함께한 추억을 사방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집으로 그려진다. 상식적으로 헤어진 전 연인과의 추억으로 덮인 곳에서,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어.

그렇기에 663은, 전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차마 읽지 못한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확고한 결론을 선고 받는 것보단, 때로 보류하고 싶어질 수 있는 법이다. 결국 집에 남은 그 흔적들을 마저 치우지 못해서 그리워 하는 것인지, 그리워해서 집에 남은 흔적을 치우지 않는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할 무렵, 페이가 끼어든다.

 

전 연인이 남긴 편지에서 집 열쇠를 찾고선, 예전에 놀러오라 했다는 스스로의 핑계를 만들어 몰래 집을 청소하고 꾸미기 시작하는데.

경찰의 집에 몰래 숨어든다는 대범함과 더불어 그 직관성은 기이하다. 친구를 주려고 샀다는 리치 한 다발이며, 친구 집을 꾸미려 자재를 한 아름 들고 있다는 말을 당당하게 당사자에게 한다는 게. 물론 그 대화를 주고 받으며 당사자가 본인인지 모르는 663의 모습도 안쓰럽다. 집에 하나의 자아가 있다고 독백하며, 집이 조금씩 바뀐 것을 한참 눈치 못채는 걸 보아, 실연의 상처가 그만큼 크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경찰 663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와있는 누군가. 저 선글라스는 정말.

마침내 전 연인의 흔적들을 다 지워내고서야, 비로소 집이 바뀐 것이 보이고 그 주체가 페이 였음을 알아차리는 장면은 새삼 설렌다.

공간이 고쳐지며 앞선 실연을 극복했으니, 마침내 경찰로서 본연을 자각하며 체포하는 게 아닐까. 힘내라 경찰. 캘리포니아에서 만나자는 말에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난다는 페이의 답신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정신을 차렸으니 도망쳐야지.

 

연이어 이별 이야기로 끝날번 했던 이야기는 작은 배려, 그리고 1년 뒤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하는 질문과 함께 이어진다.

집을 두고 근처를 방황하며 순찰하던 경찰 663은 어느새 가게를 사들여 기다리는 모습으로 바뀌어, 1년 뒤에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 페이에게 말한다. 어느 지역으로 티켓을 끊던 같이 가겠다고. 크. 세상에. 이게 영화고 이게 세상인걸까. 내가 아는 장소라곤 장소-방법-시간의 장소 뿐인데. 쉽지 않다. 장소도 문제가 아니고 시간도 문제가 아니니 방법이 문제라는 감독의 고찰인 것일까. 

 

 

광기를 표현하는 것에는, 보랏빛 조명과 큰 인형이면 충분한게 아닐까.

 

3. 결론

 

야마구치 모모에는 대체 누구기에 저렇게 나오는가 싶고,

양조위는 나이와 관계 없이 일정한 지점이 있구나 싶다. 제복이 잘 어울리시긴 한다만, 가게를 재단장 하며 페이와 마주한 모습도 어딘가 어울리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돌아온 페이는 정말 눈부시다. 어느 나라곤 따라가야지, 암. 

어떤 1년을 보낸지는 몰라도, 1년은 저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어딘가 인물 상이 겹쳐 보인다 했더니, 카우보이 비밥의 그 페이와도 연결이 된다. 썬글라스며, 자유분방함이며, 직관성이며. 

찾다보니 카우보이 비밥의 감독이 중경삼림의 페이를 연기한 왕페이를 좋아해, 배우의 이름을 가져와 썼다고 한다.

 

카우보이 비밥의 페이 발렌타인. 갑자기 캘리포니아로 떠날 것 같다.

극 전체적으로는 두 이야기를 배치한 구성과 다른 연출 기법을 보여주는 전반부와 후반부 때문에 살짝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한 장소를 두고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들을 이렇게 매끄럽게 잇기도 힘들겠지만, 어딘가 4부작 드라마를 보다만 애매한 느낌이 감돈다.

실질로 3부작 즈음에 위치했을 이야기는 왕가위 감독의 또 다른 영화, 타락천사로 분리되었다고 하니 납득은 된다만서도.

 

대만이 최근 중국과 분쟁의 일환으로 파인애플이 이슈가 된 것을 추억하며, 평점은 8점으로 마무리 짓는다.

파인애플 통조림이라니, 여러모로 사회적인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미래를 내다본 게 아닐까.

 

머리 한 구석이 비워지며 몰입했던 영화인 만큼, 글로 기록을 남기긴 모호한 영화였다.

하지만, 언제고 94년의 홍콩은 그랬었지 하며 기억엔 없을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엔 충분한 영화 아닐까.

그 순간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대단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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