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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커버넌트(Alien: Covenant, 2017)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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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6 / 10

 

미지의 행성이 미지의 대륙과 차이가 없다면, 그 뒤는 재반복뿐

 

갑자기 뇌리를 스쳐간 영화다.

어딘가 마이클 패스밴더를 한 번 더 볼까와, 스페이스 오페라 느낌 조금 나는 영화 없을까 싶다가 이 영화가 스친 것 같기도 하고. 참, 이 영화의 장르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분명히 아니다.

 

저 넓은 우주는 심해의 공포와 닿는 유사함이 서려있다. 우주복 밖은 바로 죽음을 암시하는 깊은 어두운 공간이고, 우주복의 파손은 생명의 위협과 직결되곤 한다. 그리고 시계의 제한과 소리의 변화, 동작의 제한으로 여느 방위를 봐도 사각이라는 불안감까지. 감독이 작정한다면 인물의 사각과 그 틈새로 공포를 일으키는 요소를 불러들여 화면 가득 긴장감을 채우곤 한다. 그래비티 같은 영화가 괜히 우주 공포증 있는 분들 보지 말라는게 아니잖아.

 

그런 어두운 명암으로 그려내는 두려움이 저 고전의 명작 에일리언1에 담긴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 쪽에 초점을 맞추면 인상깊은 우주 공포영화가 나왔겠지만 어디서 본듯한 영화가 될 거고. 

반면 에일리언이라는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면, 에일리언 vs 프레데터와 같은, 괴작이지만 킬링타임에는 멀쩡하네? 싶은 영화가 튀어나오는 것이겠지.

 

이 영화는, 그 둘의 지점을 방황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영화처럼 다가왔다.

짧게 기록 남겨본다.

 

인중여포 왕중 오지만디아스. 누구나 가장 제일 그 '존재' 로서 대표성을 획득하고 싶은걸까.

 

 

1. 인간으로서 강점이었을 감정들을 꼬아내기

이어지는 말은, 분명 뭔가 있어.

진화론과 창조론의 제일 핵심적인 대립은, 우리의 기원 혹은 창조자가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인지를 인정하냐 마느냐의 차이라 생각한다. 창조론자들도 진화론에서 다루는 진화의 개념에 앞서, 신이 준비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거룩한 바다에서 우리의 선조가 태어났다 말하면 혹하지 않을까. 다만 그 사이의 단계에서 우리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명제가 논쟁의 대상일 뿐이다.

고대에 손상 받지 않은 원형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서구를 관통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기독교의 창세신화를 생각해도 아담과 이브는 손상받지 않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노동의 죄업을 받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이 대립은, 데이빗을 통해 감정이 실린 듯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당신이 저를 만들었다면, 당신은 누가 만들었나요? 

인간으로서 불완전하고 노화에 시달리며 지성이 떨어지는 존재임에도 본인을 만들었다면, 그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이 질문을 통해 인간같은 존재를 만든 이는 보다 위계한 설계자일 것이라는 창조론적 관점을 정면으로 비웃는다. 

 

 

인류의 의무고 나발이고 일단 사랑을 구하러 출발하지만, 결론은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전개는, 흔히 인간이 인간으로서 로봇보다 우월하다 자부하던 강점들을 하나씩 해체해나간다.

큰 선택의 분기점을 놓고 보면, 사랑과 의무를 대비시켜 애정을 선택한 결과 배아 1000여개와 정착민 2000여명을 통째로 데이빗의 손아귀에 넘겨주게 된다. 그 사이사이에는 초기 선장의 죽음으로 인한 내부 갈등, 그 갈등을 누르기 위한 정치 암투. 그리고 선장과 부선장이 동시에 행성 탐사에 투입되어 유사시 명령체계의 불완전함까지.

 

저기 옆동네 스타트렉 보면 이럴 때 보통 그래야 하지 않던가.

아냐, 커크.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너가 이제 선장이다. 날 버리고 오리에가-6로 가. 라고 할텐데.

 

상륙시에 태풍이나 통신 장애에 대한 프로토콜도 없이 탐사에 나가는 이 허술함, 오만함. 

이 인간이 지닐 법한 낙관론, 그리고 낙관을 통한 비극에서 회복은 통상적으로는 강점이 될 수 있다. 사실 이런 긍정적이고 쾌활한 탐사 정신이 있어야, 저 깊은 우주에서 우울증 없이 다음 항해를 이어가겠지.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바로 신원 미상자에 대한 알 수 없는 신뢰 또한 약점으로서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임무에 대해 묻는 족족 설명하는 기저에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장발에 두건 쓴 사람을 왜 믿지.

통상 우리는 모르는 사람은 조심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위치가 천리타지, 그보다 머나먼 행성에서 인간의 형상을 띄고 동일한 언어로 물어오는 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친밀함, 반가움, 동질감? 작게 해외에 나가도, 같은 동양인을 보면 서로 돕거나 가까움을 느낀다고들 하는데. 긴 수면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병원균에 죽어나가는 동료를 수습해주는 안드로이드를 보면, 심적인 거리가 좁아지는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이 곳의 데이빗은 월터와 동일한 형상을 띄고 있으니, 이 지나친 방심에 대해 어느 정도 설득의 여지는 있다고 해주자.

 

그럼에도, 대뜸 나타난 데이빗에게 보안 규정은 건너 뛰고 행성 개척 임무며 배아며 개척민까지 있다는 기밀 정보를 모조리 공개하는 이후 전개는 다소 실망 스럽다. 선장의 바로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고 쿠데타를 일으키는게 올바르지 않았을까. 다시 이 장면을 돌아보면 안드로이드에 대한 뿌리깊은 멸시와 오만도 담겨있지 않나 생각된다. 설마 너가 우리를 배신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틀이 짜여 있으니, 이후 대응이 이루어질 수 없던 거겠지.

 

결정적으로는, 배에 돌아와 재차 월터인지 데이빗인지 식별가능한 질문으로 바로 검증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그렇지, 선장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추모하자는 그들이 맞나. 한번만 인간적인 정으로 기억을 검증했다면. 

작게는, 이후 로봇의 개별적인 자의식이 강해졌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식별해야하지 하는 시사점을 안겨다 준다. 지금이야 아이폰은 우리의 지문과, 저장된 우리의 데이터로 내 휴대폰이 맞는지 아닌지 식별하지만. 만약 조금 더 자의식과 고유한 데이터 수집 방식을 갖는 로봇으로 넘어왔을 때, 외형이 같으면 우린 그들을 어떻게 식별해야할까. 매번 보안질문과 같이 고유 질문으로 물어봐야할까? 

심지어 심문도 안드로이드에게 넘기는 이 태연자약함. 커버넌트는 쉽지 않다.

 

 

 

 

2. 그럼에도 답답한 놈들, 저러니까 죽지

 

동일 인물의 사뭇 다른 대사. 그러나 뒤의 신념은 가차 없이 약점을 찔렸다.

인간의 방심이라기에도 영화의 전개는 허망함을 안겨다 준다.

위의 선장이 데이빗을 바로 사살하거나 제압하지 않고 홀린듯 따라가는 장면이나. 이후 검은 액체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볼에 상처입은 동료를 의무실에 방치하는 일이나. 도입부 저 선장의 말이 다시 메아리 친다.

운이란 걸 믿지않아. 철저히 대비해야지. 관찰, 신중함, 믿음, 결단력.
남은 항해를 위해선 이런 것들이 필요해.

물론 관찰은 충실히 실행했다만 너무 관찰자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배의 안전에 대해서는 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고는 인재라던가, 이 영화 또한 결국 인재로 인한 참사를 보여준다. 안드로이드에 대한 과신, 공사 구분 없이 사적 관계에 집착, 프로토콜이나 매뉴얼의 부재, 권한 위임의 부적절성 등.

 

승무원들이 한 명씩 쓰러져 나감에 데이빗이 경이롭게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묵묵히 하나의 신념으로 뚫고 나가는 신인류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아닐까.

일전에 공자는 제자인 증자에게, 본인의 도는 일이관지라 논했다. 데이빗도 마찬가지다. 창조라하는 하나의 신념을 바탕으로, 사바세계의 잡다한 관념에 끌리는 인간을 꿰뚫었으니, 선지자의 승리로 이 영화는 끝이 날 수 밖에.

 

 

 

3. 결론.

공포스러운 서사와 공포의 대상을 설명해내는 서사의 차이가 이 영화에서 엿보였다.

에일리언의 창세설화, 우주와 행성을 아우르는 공포영화, 그리고 더불어 안드로이드와 인간에 대한 고찰까지.

에일리언1 로의 연결이자 에일리언의 기원을 다루는 프리퀼이 다듬어진 느낌이긴 한데, 어딘가 아쉬운 감이 맴돈다.

 

창조물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은 인상깊은 담론이 될 수 있었지만, 에일리언으로는 한계가 있다.

 

앞선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그 이름에서 에일리언을 떼낸 배경을 생각해보자. 밀폐된 우주와 인간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괴생명체, 흑색의 키틴질로 빛나는 기괴한 모습. 에일리언의 기원은 공포영화다. 이를 하나씩 해체하고 설명하는 순간, 공포보다는 SF으로 본질을 옮기게 된다. 그리곤 이를 위해서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결국 에이리언 : 커버넌트로 원 이름을 다시금 가져왔지만, 행성의 범주로 돌아오자 영화가 갖는 공간적인 강점은 훨씬 약해졌다. 결국 마지막에 팬서비스인가 싶을 정도의 옅은 오마주로, 에이리언은 우주공간으로 보내줄 수 밖에 없게 된다.

 

창조물과 피조물에 대한 담론도, 공포영화의 색체와 외우주 탐사물을 같이 엮으려다보니 서사가 약해진다.

여전히 인간을 숙주로 배양되고 증식하는 저 에일리언에 고유한 완전성은 엿보이지 않는다. 데이빗은 완전성의 정의를 입력받지 못한 로봇으로 끝날 뿐이지, 그 이상으로 인간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창조자로서의 관념은 다소 옅어보인다. 물론 피조물로서 인간을 배신하는 것은 인상깊다 하더라도, 본작에서 이렇게 소비될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고. 

 

결국 사유와 공포감이 줄어들고, 점프스케어와 괴기한 이미지로 전락해버리는 영화로 남게 되는데. 이런 류의 스토리는 차라리 게임이나 연작 드라마로 풀어냈다면 조금 더 전달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상상을 멈추고 그럴듯한 담론으로 대체하려 했던 본작의 평점은 6점으로 매듭 짓는다. 

평은 좋지 않게 썼음에도 평점이 그렇게 바닥이 아닌 것은, 혹시 모를 속편에 대한 기대감의 발로라고 작게 변호해둔다. 물론 리뷰를 쓰는 시점에, 그 속편 소식은 영영 취소된 듯 하지만서도.

 

조금 더 스케일을 키울 수 있는 여지는 모조리 다 차단해버리는 각본가의 구도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낀다.

외우주, 행성, 미지의 병균. 북아메리카 대륙에 죽음의 질병을 몰고온 탐사자들의 이야기를 뒤집은 것과 큰 차이가 있을까? '신들의 발할라의 입장' 만이 남을, 마이클 패스밴더로 기억될 영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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