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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아들 (Son of Saul, 2015)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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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6 / 10

 

해명 없는 신념은 그 즈음에서 멈춘다

 

왠지 밀어둔 숙제 같은 영화였달까. 언제고 추천을 받고서는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머물다가 1년 즈음 지난 지금에야 보게 될 줄이야.

문득 늦은 퇴근을 마주한 날에 이 영화의 이름이 다시 머리에서 살아났다. 

아마 늦게 닥쳐하는 숙제와, 유독 늦은 퇴근에는 작은 연결점이 있는게 아닐까, 이것만은 꼭 하고 자야할텐데 같은.

 

영화의 기록에 있어 그 날의 기분이 투영되는게 아닐까 매번 조심스러웠지만, 이 영화는 유독 더 조심스러웠던 이유가 그래서 아닐까 생각한다. 빨리 주욱 보고 빨리 쓰고 자야겠다 하진 않았겠지 하며 조심조심.

물론 펑펑 터지는 장면도 있고 충격적인 장면들도 있긴 하되 다이나믹하냐면, 어라 다이나믹한 장면도 있긴 있었지. 또 그런데 동적인 영화냐고 하면 또 막 그렇진 않고 말야.

한 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운 영화였네.

 

짧게 기록을 남겨본다. 

 

 

 

1. 무엇을 우선시 할 것 인가, 질문 없는 응답들

생기 없는 얼굴을 연기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눈에 이글거리는 무언가 얹혀있는데도 그 대상이 어딘지 모호하다.

 

종교적 배경이 없다는 것은 영화를 볼 때 때로 아쉬움으로 남는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할까, 저 행위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문을 갖게 하는 영화가 있고, 그런 영화를 마주했을 때는 홀로 의미를 분해하는 여정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적 이질감은 대개 사람이나 사회의 연장선에서 해결이 된다. 아, 저 사람은 저런 의도로 저렇게 행동하려나. 그런데 종교적인 배경으로 들어가면, 그 곳에는 피상적인 문화의 해석도구로는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그렇기에, '아들'이라 칭한 이를 위해 랍비를 찾아나서는 여정은 닿기 힘든 부분이 있다.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은 이들의 흔적을 지워나가며 맞이한 생명은 분명 아들과 같은 감각으로 다가왔겠구나, 수용소에서 마주한 헝가리의 온 소년은 아들이라 칭해도 될만큼 관계를 쌓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살아갈 수 있었다면. 존 더 코만도를 비롯해 수용소에 온 모든 이들에게, 확정적인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슬픔 이전의 깊은 무력감과 우울감을 안겨주었구나, 그럼에도 랍비까지 미싱 링크를 이어가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앞으로 살 날을 계산하며 탈출 계획을 쌓아가는 이들 사이에 껴있는 사울의 표정은, 그 무엇보다 데스마스크에 가깝게 굳어 있다. 그런 사울에게 이토록 주도적으로 타인의 계획을 방해할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대체 몇 명의 삶과 계획과 목적을 담보로, 랍비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나섰는지 돌이켜보면 먹먹하다.

수용소의 삶을 기록한 문서를 공개하겠노라 협박하다 종장에는 그 땅을 파헤치며 아들의 매립지를 찾아 헤매이기도 하고, 그 작은 화약 한 줌이나마 더 얻기 위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었건만 랍비를 찾아 나서며 잃어버리게 된다. 그 난리통에 목숨도 물론 간신히 부지했고 말야. 그 와중에 진짜 랍비 한명은 즉각 총살 당하고, 앞서 그리스인 랍비도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지 않았나.

각각의 사건에 있어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장례를 위한 여로가 과연 타인의 생과 기록을 쫓는 여정을 무시할만큼 중요한 일이었나는 와닿지 않는다. 

 

특히 단순한 기도로는 안된다며 매장을 고집하는 지점에서, 종교적인 배경이 부족함을 절절히 느꼈다. 물론 매장의식이야 한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하다만 말야. 종교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나? 이 기도의 과정에 사울의 영혼 또한 구원을 받나? 작은 도덕심의 발로인가, 종교적인 신념일까. 어떤 고민은 영화의 몰입감을 높이며 함께 고민하게 한다만, 이 고민의 결은 사뭇 달랐다.

 

 

 

2. 지독한 행위의 추적, "1917"이 떠오르는 집요함

등의 붉은 가위표는, 비스듬히 십자가를 멘 듯 영혼을 누르는게 보이는 것 같다

반면 이 여정을 죽음으로 나아가는 영웅 설화의 구조로 이해하면 또 사뭇 다르다.

영웅이 위기를 만나 고난을 헤쳐 가며 삶을 얻고 승리를 쟁취해나가는 것, 그런 류의 이야기가 영웅설화라면 말야. 영웅설화는 지극히 산 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지 않던가. 죽은 이의 죽음을 위한 여정은, 그것도 타인의 죽음을 위한 여정이라 생각하면 결이 사뭇 다르다. 오히려 너희 또한 죽은 상태지 않느냐 계몽하려 드는 의지 또한 엿보인다.

 

사울은 죽음과 가까운 일을 하며 스스로 죽은 것과 다름 없다 인지한다.

특히 존 더 코만도로서의 삶은 영혼마저 증발시키지 않았을까. 문을 닫으면 감겨오는 생지옥의 단편들에, 갓 죽은 이들의 시체를 직접 옮기고는 그 옷가지들에서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어했던 유품들을 빼돌려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종교가 없더라도 마음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 와중, 직접 눈 앞에서 숨 쉬고 있는 '아들'을 만나 다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아들'을 위해, 고난을 헤쳐 가며 아늑한 죽음을 찾아주는 여정은 죽은 이의 시각에서 쟁취의 서사로도 읽히게 되고, 죽은 이의 죽은 이를 위한 투쟁기로 보면 각각의 행위는 다르게 다가온다. 랍비라고 널 이 지옥에서 구해줄 거 같냐는 질문은 잘못 되었다. 스스로의 영혼을 구제 받으려는게 아니니까.

 

특히 종장에 금발의 소년을 혼자 보고 인식하며 웃을 때는, 비로소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안식감을 얻지 않았을까. 타인의 죽음을 지켜주고자 한 행위의 끝에, 순교적인 형태로 죽음이 그려짐은 다소 역설적이다. 전쟁 중의 포로 학살이라는 여실한 문장이 있음에도 말야.

 

영화가 깊어지며 안색이 날이 갈수록 창백해지는데, 죽음이 다가옴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듯 하다

 

아, 대상을 두고 깊게 쫓아가는 과정은 어딘가 영화 1917(1917, 2019) 도 떠올랐다. 

앞서 1917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북유럽식 영웅설화로 이해했었는데, 이 영화도 닮은 지점이 있다. 물론 사울의 아들이 먼저 나온 영화인 만큼, 서순은 다를 수 있겠지만.

 

 

3. 결론

내가 존 더 코만도라고 외치며 랍비를 찾는 지점에는, 눈물 흘리며 연기를 이어가는 광대를 보는 듯한 패배감이 감겨왔다. 

어느 랍비가 자기 생명을 하루 더 이으려고 내가 랍비요 하고 말을 하겠어. 양 옆에 총살 당해 즉각 불살라지는 이들을 두고, 이후에 어느 곳으로 나아가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 감히 지혜를 베풀 수 있을까.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은 랍비의 말로는, 그리스인 배교자로 충분히 전달되었다. 

 

옆에 있는 이들의 생명보다 타인의 완성된 죽음을 찾아나서는 사울의 행보에는, 그 배경이 되는 수용소와 지난 2차 전쟁의 무게감이 짙게 다가온다. 물론 교묘히 관점을 비틀어냈다. 전쟁의 참혹함이 초점이 아닌, 저 상황에서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했을까 고민을 한 문장씩 안겨주는 느낌.

 

장례의 순간이 다가오자 시체의 몸을 닦는 순간은, 사뭇 그 소리가 섬찟했다. 창백히 굳은 얼굴로 무기물이 마주한 소리를 내며 시체를 정돈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평점은 6점으로 우선 마무리 한다. 

영화의 개별적인 요소 - 이미지나 각각의 갈등은 충분히 전달력이 있었지만, 그 가장 큰 줄기인 왜 저렇게 랍비를 찾아나서야만 했는가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뒤늦게 글로 정리할 때는 다양한 생각이 오갔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다소 덤덤했다고 해야할까. 더 세상을 둘러보고 다시 보았을 때는, 또 다르게 기록될지도.

 

 

어딘가 회사 생활과 겹쳐보인다만, 다만 그뿐이다.

야간에 총성이 오가는 장면은 기억에 묻어둔 군 생활도 떠오르고.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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