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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Soul, 2020)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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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5 / 10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어린왕자와 도덕경을 각색해서 내놓을 줄이야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책을 읽곤 생각했다. 큰일이네.

이 영화를 보고도 비슷한 감정이 일렁였다. 이야, 진짜 큰일이네.

 

서점의 제일 잘 팔리는 책들을 보면 그 시대의 화두가 보인다지 않던가. 지금이야 코로나 전후를 막론하고, 합당한 부와 보상이 무엇인지 하는 고전적인 논의가 다시  무대 앞으로 끌려나오고 있다. 저 멀리 미국의 트럼프를 둘러싼 이야기들이나, 최근 러시아의 푸틴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다 그 연장선 상에 있지 싶다. 저 사람들이 저 부를 가질 자격이 있느냐 이거지. 가뜩이나 이 어려운 시기에 말야.

 

영화도 책과 같은 맥락으로 사회를 보여주냐고 묻는다면, 지금 당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블랙 위도우가 개봉연기 되었듯 많은 경쟁작들은 냉동창고에 머무는 길을 선택했고, 화제가 될만한 영화를 논하기 이전에 멀쩡히 개봉한 영화가 없으니까. 

다만 영화 소울은 이 험난한 시기에 픽사가 그래도 괜찮은 영화를 내놓았다는 평을 받았고, 여기에 흥미가 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과연 시대가 바라는 메세지를 담아냈을까, 2020년의 마지막 - 혹은 2021년의 시작에 앞서 우리가 찾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

 

간과했던 것이 있다면, 인생은 참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대는 무너지기 마련이고, 기대가 클수록 무너질 확률은 높아지는게 수순인데.

오후의 햇살이나 더 받아볼 것, 이게 영화의 가장 직관적인 답변 아니었을까.

굳이 영화 속 이미지를 쪼개어 보면 어린왕자 한 스푼에, 도가적인 삶에서 찾는 행복 한 줌, 거기에 더해 어딘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중 한 장면 까지. 음악적 감수성이 약해 재즈 멜로디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게 아쉽다. 그래야 영화 리뷰에 한 줄이라도 더 남겨볼텐데.

 

작게 리뷰를 남겨본다.

 

 

1. 자조적인 희극만으로 끝냈다면

삶의 교훈을 담아내는 이야기의 주된 클리셰는, 멘토의 자조적인 관점과 그로 인한 공감 아닐까.

링컨도 화나게 하고 테레사를 울리기도 한 22의 자기 어필 못지 않게, 조 가드너의 자조적인 시각 또한 강렬하게 다가왔다. 저 판을 돌리는 광인 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즈를 쫓다가 돌고 돌아 중학교 파트타임 강사, 그리고 다시 재즈클럽의 일원으로 나서는 길에는 연금술사를 읽으며 느낀 헌신마저 엿보인다.

 

다만, 이 자조적인 시각이 타인에게 이전되는 시점은 합당했나 의문이 든다. 예를 들면 미용실에서 조 가드너의 목소리를 빌려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 미용사로서의 소명의식 보다는 살아가다보니 이런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무례함과 삶에 대한 호기심을 아슬하게 걸친 듯 했다. 

 

그리고 테리의 회계사를 빗댄 일이나, 펀드 매니저가 영혼이 길을 잃고 있은 직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묘사된 모습은 지극히 단순한 직업적 편견을 강화시켜 아쉬움이 남았다. 되려 앞서 미용사와 더불어 직업을 성급히 깎아 내린게 아니었나 싶다. 덜 죽었는데 죽음 처리 하는 저승의 시스템이 더 문제가 있다면 있고, 그 와중에 탈출을 시도한 조의 행위가 테리보다 옳아보이진 않았는데 말이지.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동이 일렁이기 앞서 어딘가 답답함이 남는 것은, 이 기묘한 비꼼과 예술가에 대한 찬사가 합당한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해결된 문제가 무엇인가 의문이 일렁이면서, 영화 저변의 이야기는 이상한 구멍으로 빠져든다.

 

2. 사실 해결된 것이 무엇이 있더라

 

아버지의 양복과 22의 목숨을 빌어 돌아온 지구, 무엇이 행복인걸까. 지쟈스.

조가 마지막에 지구로 돌아가는 기회를 받았을 때, 돌아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돌아와 혼신의 연주 끝에, 이 빛나는 순간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반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의 공허함이 너무도 거대해보였기 때문이다. 영혼에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공연을 한들, 다시 내일도, 그 다음날도 똑같은 수준의 공연을 재연하고 반복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즉흥연주로 대변되던 재즈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조는 22에게 유의미한 메세지를 돌려줄 수 있었지만, 그조차도 22가 몸을 사용하며 남겼던 기억들 - 햇빛, 나무 이파리, 사탕 등 작은 순간들에 대해 새롭게 받아들인 순간들 뿐이었다. 조가 다시 삶에 대해 감사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공연이 끝나고 나온 뒤 그 공허한 순간이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오늘날 번아웃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영상에 담아내었지만, 그 해답은 다소 부족했다.

 

조의 행태 뿐아니라, 사회적인 메세지도 매우 옅게 제시되고 진부한 대답만을 남긴다.

앞서 조의 제자가 음악에 몰입해 연주하자 조롱당하는 장면은, 진중함이 웃음 거리가 되는 오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보다 오래된 랍비가 할 법한 대답 - 사실 음악을 좋아하지? 하는 되묻는 메세지로 끝나버렸다. 작가도 슬램덩크를 보았다면, 보다 설득력 있는 메세지를 담았을텐데. 22 그 자신 또한 미용실에서는 미용사의 삶에 대한 기묘한 질문들, 그리고 옆의 조롱하던 이를 다시 물먹이면서 여실히 사회의 쓴맛을 보여준다. 결국 타인의 실패에 대해 조롱하는건 매한가지인데, 저게 그리 유쾌한 장면이었는지는 글쎄.

 

3. 결론

꿈동산 이지만, 편견은 가득하다. 

사회적으로는 보다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였다.

22의 행태와 조의 행위 사이에는 요새 mz세대와 기성세대의 대립 어느 사이를 보는 듯한 감각도 있어서, 재미있게 읽히곤 했다. 특히 22는 모든 것을 두루 살펴보고, 뛰어난 재능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현 세대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통신 기술과 정보 저장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성공한 재능을 공유하다 보니,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실패를 경험하기도 전에 우열에서 밀리는 현상을 자각하고 깊은 우울감이나 비관주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닐까. 

 

그렇기에 나온 해답이라고 일상의 불꽃은 거창한 목적이 아닌 작은 행복이라는 메세지는, 너무 공허하게 다가온다. 

역사의 되감기를 짧게 돌리면 히피즘, 길게 돌리면 쾌락주의로 빠지기 쉬운 대목일 뿐니까. 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더 불안정한 직업으로, 다른 일상을 선택한 것이 하나의 결론이라는 게, 그리 설득력이 있진 않았다. 굶주림과 그에 따른 페퍼로니 피자로 행복감을 느낀 것이 삶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순간이라면, 돈 벌어서 대마초를 피우는 이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결국 시냅스에 불꽃을 팡팡 터뜨리는게 중요하다면 말야. 행복에 대한 정의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야기 되고 있지만, 삶의 동력이 단순한 행복감이라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부를 비웃고 반전주의를 외치며 개인의 행복이나 쾌락을 외치면, 위선적이라는 비평이라도 던질 수 있겠지만.

조의 마지막 지점은, 인생은 꿈의 달성이 아닌 상태일뿐이고 성취로 행복을 얻지 말라는 공허한 메아리만 울린다. 

 

사회에 대한 부족한 비평과 아쉬운 메세지, 거기에 더해 사회적 편견까지 담아낸 영화. 소울은 5점으로 기록을 마무리 한다.

서사나 담긴 메세지는 아쉬웠지만 시각적으로는 인상 깊은 지점이 있었고, 마음 비우고 본다면 찾을 수 있는 가치는 담고 있다. 

그래도 코로나 시국에 당당히 개봉을 했으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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