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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2000)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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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8 / 10

 

혜성이 잠깐 다가왔다가 멀어져가면 이런 느낌 아닐까

 

어디선가 소설 속에서 접한 영화 제목이었는데, 하는 생각 뭉치로 항상 닿아 있었다. 누구의 소설이었는지는 기억이 쉽게 나지 않네. 장강명씨가 언급을 했던가? 아니, 좀 더 여성적인 문체였던 것 같고. 아, 어릴 적 왜 있지 싶던 집 서재의 책 중에는, 이미나 작가의 '그 남자 그 여자' 가 있었다. 아들 두 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남자내음 나는 공간에, 라디오 감성 산문집이라니. 왠지 화양연화라는 이 네 글자를 여기서 만난 듯 싶다. 어딘가 반짝이는 듯한 애틋함을 담고 있는 영화. 그런 감정의 모임 아닐까 기억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2020년에 이르러, 리마스터링 되었다는 기사를 보자 기억 한편의 덩어리가 비로소 생기를 얻은 것이다. 이야 이게 그 영화구나.

정작 시간이 다시 흘러 집에서 시간을 갖게 되자 저 붉은 포스터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쉽지 않네, 영화 찾기.

 

화양연화를 보는 경험은, 어딘가 비냄새가 몽글 거리는 혜화동 밤거리를 걷는 것과 같은 감각을 안겨다 주었다.

산의 찬기운이 닿아서 일까, 비가 내리면 찬 기운과 습기가 몽글거리며 밤의 조명을 보다 눈부시게 만들어주었는데, 화양연화도 딱 그런 느낌이다. 어딘가 예전 기억이 구름마냥 빛을 품고 반짝이는 듯한 감각. 보고 있자면 홍콩의 오랜 벽들과 어색하게 썰어먹는 스테이크가 기억 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던 듯 다가오는, 그런 감각들.

 

왠지 계절감이 없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여름 같지만 여름 같진 않달까. 혜성이 움직이듯 남긴 감정의 긴 일렁임에는 지구의 계절이 크게 의미가 없던게 아닐까.

작게 기록을 남겨본다.

 

 

1. 결혼했더니, 나만 잘하면 되는게 아니더라

이야. 직관과 관찰력. 인간의 지성이 언제 빛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람을 예견할 때.

화양연화에 놓여진 이야기는, 기묘한 도덕적 맥락을 안겨준다.

가령,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남은 이는 여전히 가정에 충실할 의무가 있나? 저런 상황에서 즉각 이혼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초 모완이 되새기듯 내렸던 대답은 이렇다. 우린 그들과 다르다. 같은 처지에 놓인 기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다르기에 이런 끌림에 저항할 의지가 있노라고.

 

이 작은 목적성과 연대감은, 오히려 다양한 방법으로 추억을 쌓게 도와준다. 아픈 초 모완을 생각해 나가서 늘상 하듯 국수를 포장해 혼자 먹지 않고 검은깨 죽을 준비해 이웃에 나누는 수 리첸의 모습. 소설 쓰기를 도와달라며 너슨하게 말 나누는 초 모완. 갑작스럽게 집주인 일가가 돌아오며 마작판을 벌이자, 우스꽝스럽게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그 순간들까지.

 

사람과 사람이 가장 친밀해지는 방법은, 첫번째가 함께 위험한 장난을 하는 것, 두 번째가 비밀을 나누는 것이랬던가. 서로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끼리만 공유하고 그로 인해 시간적 결핍을 함께 채우며, 그 누구보다 친밀한 감각이 쌓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전 세계 공통, 인류가 얻어낸 하나의 결론

다만 그 와중에 의문이 남는 것은, 결국 다음의 대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어요" 라니. 너무 확고한 말이지 않나하는 불안감과 함께, 의혹이 일렁인다. 이 새로운 인연이 다른 결말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걸까. 사실 수 리첸과 초 모완이 새로 만난다 한들, 결혼이 힘들다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텐데 말야.

 

수 리첸은 그렇기에 관성을 선택한 게 아닐까 싶다. 끝내 망설이고 뒤늦게 맴돌았을지언정, 지금의 결혼의 형태를 어떻게든 유지했으니까. 그렇기에 후일 자식과 함께 돌아온 수 리첸에게서, 추억에 얽혀버리지 않은 그리움만 먹먹히 실려올 수 있던 게 아닐까. 캄보디아에서 다시금 비밀을 묻는 초 모완의 슬픔과는 사뭇 다른 결말이었다.

 

 

2. 번뇌의 순간마다 경을 읊듯 나오는 음악이란

사무 공간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던 한 시대의 모습

국수를 포장해가며 마주치거나 마작판에서 인사하거나. 같이 소설을 쓰는 장면이며 이별의 순간을 연습하기 직전까지.

모든 번뇌의 순간에는 특유의 음악이 항상 함께해 있다. Quizas, Quizas, Quizas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싶더라니, 또 여기였을 줄이야.

물론 가장 강렬히 남은 곡은 Yumeji's Theme의 첫 세 마디 였다.

 

주 모완의 고민에 빠진 눈빛과 경쾌한 북소리가 함께하는 음악을 듣고 있자면, 자연스레 고뇌를 벗어나기 위해 수행 중인 중의 모습과 목탁을 두드리며 경전을 읊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물론 그 경전의 내용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이라는 것은 참 슬픈 일이지만.

글로 쉽게 옮겨 내기 힘든 영상미와 음악의 조화는, 두고 두고 어딘가에 담아 기억해두고 싶다. 음악적 기록을 남길 재능이 없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3.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요

여자가 있냐 묻는 질문, 그리고 이별의 순간을 고하는 장면의 앞에는 둘의 약속과 재연이 함께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으니, 도와주세요, 하는 간결한 말과 이어지는 상황극.

 

그리고 그 끝은 항상 마음이 일렁이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애잔한 마음이 가득한 표정의 수 리첸과, 그를 달래는 주 모완. 진짜도 아닌데 괜찮다고 읊조리는 모습을 보자니, 1966년 캄보디아의 사원을 헤매이며 돌 벽 사이에 말하고는 흙으로 채웠어야만 했던 비밀을, 고스란히 같이 품게 된 느낌이다.

 

그렇게 상황극까지 하며 연습한 말들이 있었지만, 반면 연습도 채 못한 체 닿지 않은 말들이 있어 보다 애틋하게 다가온다.

"배표 한 장 더 있다면, 나랑 같이 갈래요?"와 함께 싱가포르로 떠난 주 모완의 말, 그 뒤에서야 "배표 한 장 더 있다면, 날 데려갈래요?" 하는 수 리첸의 모습이란.

물론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댈 여지도 비로소 생겼다. 다만 앞서 생긴 연대와 비밀의 공유 끝에 마냥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이제는 고대의 유물이 된 수화기, 그 너머 닿지 않는 말에 눈물 흘리는 장만옥을 보고 있자니, 이 상황과 인연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마저 흐려진채 홍콩과 싱가포르에 걸친 기억을 함께 담게 된다. 

다소 관대하게도, 뒤늦게 주 모완의 자취를 따라가는 수 리첸의 행적은 관객의 시각에 중재점을 선물해준다.

그 시절로 빛나고 추억할 뿐 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4. 결론

옛 집에 돌아와 주 모완이 소식을 듣고, 싱긋 웃으며 선물을 집주인에게 안겨주는 장면에서는 정의내리기 힘든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옛 감정을 아직 갖고 있다는 신호였을지, 번뇌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여서 였을지. 

 

과거에 왜 떠나지 못했을까는 정말 무의미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결국 그 때는 떠나지 못했을 이유가 있었던 것 뿐이니까.

그런데 뒤늦게 쫓아와 옛 추억만을 확인하고 다시 본인의 생활로 돌아가는 일 또한, 무의미한 일인 것일까.

 

 

평점은 8점으로 기록한다.

10점 중 8점이라면 어딘가 아쉬운 지점이 일단 봉합될 듯 하다. 

서사는 아직 깊게 이해하기에 경험이 부족하지만, 음악과 배우의 연기로도 감정은 잘 전달 되어 왔다.

다만 이 정도로 기록을 마무리 짓는다면, 이 영화를 비로소 보게 된 시점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느날 홍콩이나 싱가포르, 캄보디아의 이름을 듣고서 예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지 하곤,

채우지 않은 평점을 확인하러 떠날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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