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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Farewell My Concubine, 1993)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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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9 / 10

 

또 이만한 영화가 나오려면, 세상이 몇 번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장국영이라는 이름은 왜인지 친숙하다. 

여느 응답하라 시리즈였는지, 너 장국영 닮았다 하는 말이 맴돌아서 그런걸까 싶다가도,

한 유명스타가 투신해 죽고 팬들이 뒤따라 죽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남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2003년에 내가 이 영화를 본 상태였다면, 비슷한 상실감을 나누지 않았을까. 

 

영화의 이름인 패왕별희 또한 마냥 낯설진 않았다.

초한지며 삼국지며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읽었던 터라, 제목을 스윽 보곤 그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며 나타나는 것이다.

건곤일척의 전투, 해하에서 십면 매복의 계, 그 끝에 사면초가의 고사와 함께 마지막 이별을 노래하는 우희의 이야기.

일전에 경극으로 남아있다곤 들었는데, 그걸 배경으로 다시 이야기를 짜내어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 여러모로 대단한 영화다.

 

코로나 틈에 개봉 첫날인줄도 모르고 조용히, 그리고 정신없이 빠져든 영화 패왕별희.

작게 기록 남겨본다.

 

 

 

 

1. 명세가 아닌 행위가 그려내는 삶

일단 무슨 말로 기록을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으니, 찬사를 바치고 시작해본다.

 

인물의 연기며, 색감이며, 적절한 여백과 적막, 일상과 사건의 배치가 모두 인상 깊었다. 

돌이켜 보면, 단순히 요새 영화들과 다르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한 듯 하다. 보여주는 기법이 다르고, 그로 인해 호흡의 주기가 달라진다.

 

특히 이 극이 전개되는 호흡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영화는 3시간의 긴 러닝 타임 동안 담담하고 집요하게 행동과 표정을 쫓아간다. 어딘가 영화 원데이(One day, 2011) 가 연상되는 박자감각이었는데, 상업주의의 꽃 어벤져스(The Avengers, 2012)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호흡이 조금 더 전달이 될 듯 하다.

 

어벤져스 속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신경전. 

플레이보이, 부자, 대담함을 제한된 시간 동안과 씬에서 어떻게 묘사해야 맞는걸까. 

어벤져스에서는 대비되는 인물을 직접 보여주고, 그들의 대화로 그려낸다. 보여줘야 할 사건은 앞으로 산재하니, 인물이 직접 가이딩 해주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어서 스티브 로저스란 인물의 성격도 좀 더 확고해지는 장점이 있지만, 관객에 따라서 지나치게 짧고 빠르다 느낄 수 있다. 아이언맨의 개인 영화가 아니니 불공정한 비교일 순 있지만, 영화 내적으로도 어벤져스의 첫 결집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인물 분석이 옅다는 비평은 있었다. 

 

한편 유사한 인격의 묘사를, 패왕별희에서는 사뭇 다르게 보여준다.

주샨이 처음 등장하는 술집 장면에서, 여유롭게 웃으며 뛰어내리라고 신호하고는 바로 약혼날이라고 능청맞게 둘러대는 장면에서, 아이언맨이 그려냈을 바람둥이, 부자, 능청맞은 모습이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된다. 거기에 직접 찾아온 주샨에 당황하다 공개 결혼을 선언하는 허당끼 있는 모습까지. 시투의 인성을 어휘와 단어로 쉬이 정의 내리지 않고, 이렇게 행동의 연속으로 보여주는 것은 영화 말미에 결국 그 당당한 행동이 바뀌어가는 것으로 보다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왠지 달기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긴 호흡의 인물의 묘사는, 시투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장대인과의 어두운 기억부터 목적을 가지고 원대인과 친분을 이어갔던 두지며, 또 다른 삶을 꾀하다 유산에 이어 사랑마저 부정당한 주샨까지. 저 사람은 마냥 악인인가, 혹은 저들은 사랑하는 이인가를 끝임없이 다른 행동들을 통해 되물어준다. 

 

악녀와 생존력 있는 강인한 모습을 오고 갔지만...

이러한 보다 긴 호흡의 묘사가, 마냥 화려하지 않고 담담한 파스텔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다가온다. 

그리고 의문을 머릿속에 맴돌게 만든다. 두지는 시투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벗으로서일까, 연인으로서 일까.

아니면 경극을 같이 하는 순간들을 사랑한 것일까,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사랑한 것일까.

주샨을 질투한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였을까.

이 생각들을 한번 정리를 하고 나면, 영화는 가차없이 다음 시점으로 옮겨가며 다른 시대속의 두지, 시투, 주샨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렇듯 행동으로 인물을 고스란히 그려내는 방식은 깊은 여운과 함께 아름다움, 서글픔을 안겨준다.

대뜸 나는 소수자야, 혹은 나는 세상으로 부터 차별 받고 있어라고 메세지를 던지는 근래의 방식에는 너무 확고한 인지의 경계가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보다 은은하게 삶과 사랑의 변화 그 모든 것을 끈질기게 보여주기 때문아닐까. 

 

 

2. 중국 근현대사 한복판의 조명

온통 붉은 깃발들 사이에서, 경극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던 모습이란.

영화속에 쪼개 담긴 시대의 변화 또한 다채롭다. 

경극배우라는 수행하는 역할은 깊게 뿌리가 내려 변하지 않지만, 시대가 거칠게 바뀌어가며 경극배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고, 그 속에서 두지, 시투는 어떤 행동들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으면 또 다른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어떤 행동이 맞았을까, 내가 저 시대 속에선 어떻게 행동했을까. 혹은 이 영화의 결말에 해피엔딩은 가능했을까 등.

 

각각의 시대에 맞게 개인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했는가는, 시투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동네 양아치 정도야 호기롭게 맞서던 패왕에서, 스스로 자신은 일개 가짜 패왕일 뿐이라며 낮춰가는 대목. 그리고 끝내 두지와 주샨까지 팔아가며 자기비판을 완성하는 대목은 처참하기 그지 없다. 목숨은 부지 했지만, 그 뒤에 살아갈 이유를 다 잃은 이 또한 있다는 것은 더욱 더 비극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반면 변하지 않는 개인을 통해 시대가 바뀌어가는 것은 두지를 통해 선선히 드러낸다.

복색의 변화도 복색의 변화지만, 스승이 죽고 후계를 키울 때가 되자 이제는 경극배우가 아닌 당원으로서 스스로 부각하는 제자며.

다시 그 악연의 끝에 마지막 잘 정비된 경극 연습실에서 재회하는 모습은 되려 너무 잔인한 장면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일전에 읽은 몇몇 책들에서 시대에 맞는 예술, 혹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예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사회적으로 합당한 미학을 설정하고 강요하는게 그렇게 큰 일이었을까, 쉬이 와닿지가 않았는데. 저 옆나라의 문화대혁명은 정말 거대한 사건이었고, 그 너머에 전통과 예술을 잇는건 저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의문이 남는다.

 

한 참의 세월 후에 경극은 다시 재조명 되었고 살아남아 옛 예술은 전승이 되었지만, 그 끝에 이별 이외의 선택지는 우희에게 없는 듯 보인다.

 

극장이며 거리에 걸리는 깃발들이 매번 바뀌는 것 또한 한편으로 흥미롭고 또 한편으로 애잔하다. 마냥 다른 나라 이야기는 아니네.

 

3. 그 때 색감이 이런 거였구나

작게 색감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면, 과장되기 쉬울 법한 색조가 은은히 눈에 담긴다. 

특히 붉은 빛이 정말 다채롭구나를 새삼 알려준달까. 생과 광기, 죽음까지 붉은 빛이 곳곳에 다른 깊이로 감돈다.

 

이렇게 뿌연듯 밝게 닿는 장면도 있지만

 

그리고 시대상 또는 극의 흐름에 맞게 빛이 오고 가는 것도 인상 깊다.

 

경극 무대, 일본군이 들어선 밤의 거리. 문화대혁명 후 공산당이 추적하던 쨍한 햇볕 아래.

빛 뿐 아니라 그 열기, 서늘함 마저 전달되는게 어디서 기인한 전달력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푸르게 보이는 눈 너머로 온기가 생생히 전달된다

 

 

 

4. 결론

 

보고 나서 한참을, 여운과 우울감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지금 보니 우울감이 아닌 슬픔이라 하는게 맞았지 싶다.

 

마지막 두지의 이름을 다시 고쳐 부르던 시투의 표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저런 세상사를 기억하거나 직접 전해들은 이들이라면, 불변의 권력에 목을 메지 않을까 싶다.

저토록 위세를 부리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서 껌을 팔고, 수갑을 차는 일을 보아왔으니.

성공을 했다! 가 아닌 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감각이 설운 저주 처럼 뒷덜미에 맴돌지 않았을까.

 

평점은 9점으로 기록을 마무리 짓는다.

매혹적인 장면과 호흡이 다른 점은 인상 깊었지만,

반대로 동시대의 영화를 아직 덜 보았기에 지나치게 찬사를 바친게 아닐까, 우려가 남았기 때문이다.

이게 오리엔탈리즘이랑 차이가 뭐야 하는 경각심으로 1점 덜어내고,

다시 재개봉을 할 다음 여느 날에 마저 채워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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