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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Midsommar, 2019 )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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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판 포스터.

 

0. 들어가며

 

4 / 10

 

우려했던대로의 과도한 시도, 러닝타임으로 5시간이 주어졌다면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감독의 전작 '유전' 리뷰에서, 근래의 공포영화의 기법과는 사뭇 다르지만 조금만 더 나아가면 사랑받는 공포영화는 되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그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여실히 불편함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길 바랬건만, 좀 더 포괄적이고 노골적으로 앞선 불편함들을 곳곳에 무장시킨 영화가 나타났다. 악마와 같은 구체화된 대상에서 하나의 사람 집단으로, 전통으로 잘 포장된 감추어진 악의, 그리고 보다 선명해진 섹스, 약물, 시신에 대한 다양한 묘사까지.

유전보다 한 템포 더 느리게, 그리고 거부감 있는 장면들을 음악부터 표정, 상황까지 곳곳에 배치했다.

감독은 어쩌면 관객들에게 무언가 시도하려는 자신만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게 아닐까. 본인의 영화 장르를 구축하고 싶다 또는 관객을 골탕 먹여보겠다라는 식의, 신념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작품을 내기 힘들 것이다. 

 

 

일단, 여름이고 분류상으로는 공포 장르에 포함된 영화다.

공포 영화라기엔 오묘하다. 그리고 여름이 배경이지만 여름다운 영화도 아니다. 물론 피라냐 3DD(2011)이나 트라이앵글(2009)와 같이 작은 조각이나마 시원한 느낌이 있길 바란다면, 다른 공포영화를 보자. 하지를 가리키는 midsommar의 의미 답게, 뜨겁고 높은 태양빛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듯한 영화다.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 커플이나 친구들끼리 보기에는 더더욱 모호한 영화다. 공포 영화 연구회 정도 되는 친구들과는 같이 보러가자. 그 정도 영화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면 좌석에서 슬금슬금 일어나려는 옆 관람객들을 의식하게 된다. 관람중에 10명 가량이 영화관을 떠났고 (물론 가득찬 영화관이었으니 다행이지만), 끝나고 나니 같이 봐준 것에 감사하라는 대화들이 들려왔다. 호불호는 많이 갈린 듯 하다.

아, 혼자 봐도 무섭진 않다. 그래.

 

그럼에도 이 영화에 가치가 있다면, 마침내 한국에서 이 정도의 영화가 개봉이 가능해졌다는 것에 작은 의의를 두자. 

물론 영화 자체로도 소리, 연출 시점, 독특한 영상미,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해까지 다뤄봄직한 요소는 있다.

천천히 기록해본다.

 

 

 

1. 끝임없는 강요의 기법, 덤덤하고 가깝게

감독의 전작 '유전'에서 또한, 일련의 끔찍한 장면이나 시신을 여과 없이, 최대한 가까이서 응시하는 연출이 있었다. 그런 일련의 연출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인식, 천천히 쌓아 올려지는 거부감 혹은 불편함을 통해 공포감과 유사한 감정을 끌어왔었다. 어쩌면 해당 영화는 이러한 불편함, 혹자는 본능적인 혐오감이라 부를 감정과 공포감을 엮어보려는 시험작 아니었을까 생각해봄직하다.

 

그리고 미드소마를 보고 난 뒤에, 위의 사유에서 하나 틀림점을 발견했다. 

'최대한' 가까이서가 아니었다. 미드소마에서는, 보다 더 덤덤하게, 보다 더 가까이에서 일상의 현상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된다.  

크게 세 가지 요소로서 영화 속에서 강조된다.

 

- 잔인함과 불편함을 넘어, '과정'의 묘사

 

그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단어의 어감과 망치를 드는 장면, 인생의 4단계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히 암시가 된다. 해서 놀랍진 않을 줄 알았는데, 그 묘사는 너무 적나라하고 과감하다.

떨어지는 두 명의 노인과 그 충격으로 잔혹히 파괴된 인체며, 죽음에 이르지 않은 이를 망치로, 얼굴을 내리치며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장면에서는 전율도, 공포감도 느낄 겨를이 없다.

보통 내리치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돌리며, 먼 곳에서 보는 시점으로 돌리며 영화 수위를 지킨다면, 이 영화에서는 가까이서 관측하기 때문.

사람은 떨어지면 어떻게 다치나, 어떻게 죽나. 어떤 상태가 되나. 이를 너무 세밀히 전달한다.

이 죽어가는 과정의 묘사, 혹은 파괴되는 과정의 묘사는 내가 보는 영화가 공포영화 맞나 의문을 갖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죽음은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는 듯한 연출이 드러난다. 초기 부모님의 죽음이나 이후 일어나는 죽음까지, 갑작스러운 화면의 전환이나 음악의 전환 없이 덤덤히 지나가며 담아진다. 해서 마치 나비가 날아들고 나무가 일렁이는 다른 일상과 똑같은 무게로, 죽음과 그 사체는 다루어지게 된다. 물론, 많은 이들은 여기서 다시 불편함을, 혹은 일련의 역겨움을 느끼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러오면, 사실은 축제였지만 이상한 사람들의 모임에 끼어들게 되어 추격전을 하고 탈출을 하고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미안하지만 나도 틀렸고, 다른 관객들도 틀렸다.

이상하지만 하나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안에서, 강제로 죽음은 관람해야한다. 그리고 이 특징은 다음의 요소로 보다 강화된다.

 

 

 

 

 

- 가까워진 카메라의 거리, 내 반경으로 들어온 장면들

 

영화의 초기부터, 카메라는 사정없이 인물을 가까이서 담아낸다.

묘하게 클로이 모레츠를 닮은 주연 배우의 감정과 표정 묘사부터, 죽음에 대한 묘사 또한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담아낸다.

쉽게 말해, 화면 가득히 한 인물이 담기거나, 건물이 담기거나, 죽은 이가 담긴다.

그리고 이 크기에서, 너무도 가까워진 거리감에 움츠러 들게 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인물간의 대화를 담아낼 때 말고는 대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 거리감은 담긴 인물들의 배치와 원근감, 그리고 화면에 담긴 크기로 이해하게 도와준다.

이 영화에서는, 그 거리를 엄청 좁히고 중요한 사건 마다 우리는 가까이서 강제로 관람하게 된다.

그게 마치 1인칭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혹은 영화의 일부로 관객인 본인이 참여하는 듯한 인상마저 안겨주며 영화가 주는 불편함은 혐오감으로 넘어서기 시작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교 모임을 할때, 처음 만나 인사하는 거리, 가까운 사람 간의 거리 등 거리마다 그 친밀도가 다르다지 않던가. 이 영화는, 친밀하지 않을 장면들을 가장 가까운 이의 거리에 두고 관객을 응시한다. 이 장면은 어떠세요.

 

 

- 음악의 보다 강렬한 이용, 그리고 교묘한 삭제

 

전작에서 심심할 수 있던 음악적 요소를 보다 다채롭게 이용한다.

도입 부의 불안함을 암시하는 강렬한 음악, 메이퀸의 어딘가 불안함을 안겨주는 축제 음악, 그리고 성교의 순간에 어딘가 나사빠진 뮤지컬을 보는 듯한 단체 교성 (말을 쓰고 보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보겠지만, 진짜 나오는 장면이다.) 등.

제일 강렬한 순간들은, 이런 소리를 활용함에 있어 과감한 삭제의 순간들이 있다. 정적이 긴장감 있는 정적이 아닌, 정말 머리가 비어지고 멍해지는 정적. 주연 배우의 내면이 그대로 와 닿는 음악 요소로 정적이 다가선다.

 

위의 정적을 묘사하는 것은 마냥 긍정적으로 보긴 힘들다. 공포영화에서 일련의 긴장감을 조성시키고 해방 시키는 것에, 음악은 분명 중요한 요소기 때문이다. 할로윈(2018) 에서 마이클 마이어스가 나타날 때, 아무런 음악이 없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는 그냥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살인 모습을 담는 영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음악을 통해 적절한 긴장감의 조성과 해소, 관객에게 뻔하다 욕먹을 지언정 예측하게 도와줌으로서, 금지될 법한 묘사들이 영화로서 구성을 갖춰간다.

그리고 미드 소마에서는 이 음악적 삭제를 통해, 덤덤한 응시를 강조한다. 죽음은 일상이고, 혹은 영화속 묘사대로 순환이며 우리의 일부이니, 빈 감정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음 장면이 무엇이 나올지는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보면서도 예측할 수 없게 되고, 이는 다시 덤덤히 나타나는 죽음에 보는 이를 웅크러 들게 만든다.

 

 

위의 요소들로 인해, 관객들은 끔찍한 요소들을 보는데에 있어 사전 준비 없이,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가까운 거리에서.

이는 분장기법에 대한 찬사를 바쳐야할지, 아니면 이런 장면을 경고 없이 노출시키며 강요시키는 영화의 문법을 비판해야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비난 받아도 된다 생각한다. '유전' 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탔다면, 이 작품은 그 선을 과도히 밀어버렸으니까.

 

유전과 대비되는 비교는 필연적인게, 감독이 동일할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똑같이 긴장감을 누적 시키고 끝을 보여준다.

 

2. 보여줄 것만 보여주자, 해소 없는 긴장감의 누적

한 겨울 가족은 돌연 죽고, 이후 하지까지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지속되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알아야할 건 대니의 가족이 죽었으며, 그 연인관계는 불안정하고 이번 여행은, 정말 우연히 끼어들게 되었다는 것 뿐.

물론 그 사이에는 긴장감이 누적된다. 가족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 부터 대니 역의 플로렌스 퓨가 쉴새 없이 보여주는 폭발적인 감정의 묘사, 그리고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연인관계. 

존윅이 이런 자질구레함을 설명하지 않고 한 발이라도 더 쏜다면, 미드소마는 이런 자질구레함을 벗어던져두고 스웨덴 어느 마을의 기이함을  한번이라도 더 보여준다.

 

 

 

이 기이함의 누적은 정말, 교묘하다.

드넓은 푸른 초원, 룬 문자, 각진 목조 건물, 온통 흰 전통의상을 갖춘 이들. 보면 평화로워야할 장면들 사이에, 복선이 되는 벽화, 갑작스러운 실종과 너무 차분한 대응, 죽음에 대한 묘사 등. 이 잔혹함 - 혹은 불안정한 요소들을 앞선 덤덤한 시각으로 응시하며, 여기에 불안함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가? 하며 불안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영화의 배역들이 보여주는 안이한 태도에 답답해 하면서도, 저 밖의 평화로운 영상미에 의아하게 된다. 이 영화는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지, 내가 어떤 공포감을 느끼려는 거지.

 

그리고 '유전'과 유사하게, 이 긴장감은 해소 되지 않은채 끝이 난다.

주인공 일행은 악에 패배했는가?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주인공 일행인걸까 부터 모호해진다. 대니는 성공한 건가? 무엇에 대해? 안정을 얻기? 친구들과 관계를 회복하는 여행하기?  

철저히 마을 구성원의 승리로 끝났냐면, 그렇다. 그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룩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존의 퇴마를 행하거나 생존을 요하는 공포영화들과는 다르게, 베드 엔딩으로 끝나며 묘한 미완결의 느낌을 안겨준다. 다만 유전의 피터가 생존과 탈출을 원했지만 쟁취 못했다면, 대니는 안식처를 얻길 바랬기에 좀 더 종결되는 느낌은 남는 편. 물론 관객들의 마음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3. 가족에 대한 해부

영화에서 모든 시각적 충격을 배제하고, 내용으로 돌아와 보면 미드소마는 '가족'에 대해 분해하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대려고 연애하는 거 아냐?

그 야심한 시각 일지언정 긴급한 문자에 모두 응답 없는 가족, 그리고 친구보다 대화가 짧아지고 위로가 되지 않는 남자친구. 이 공허한 관계들 사이에서 대니는 진정제와 수면제로 버텨나가는 작은 인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족 마저 사라지자, 그럼 누구에게 기대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은 타지에 나와 사는 모든 자취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질문일 것이다. 

 

 

 

이질감을 주는 요소는 명확하다.

그런 대니와 일행들이 도착한 마을의 가족 집단은, 어딘가 다르고 이상하지만 하나로 튼튼히 묶여 있음을 끝임없이 보여준다.

찾아온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는데, 여느 장면에서고 그들끼리 불안해하며 의논하거나 뒷처리하는 모습이 없다. 모든 구성원이 철저히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으며, 이에 내부 분열이나 불안도 없이 굳은 단결력을 보여준다. 이 집단에 대한 묘사도 초기의 commu, community 등의 지칭에서 펠레가 자부심에 가득차 설명함에 따라 family로 격화되어 간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대니의 관점에서 편집해보면 하나의 모험기이고 영웅 설화스럽다.

거리가 멀고 와 닿지 않던 가족, 그리고 공감 받지 못하던 남자친구를 두고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그에 성공했다.

이제 대니는 영화 초기의 공감 해주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에 안겨 홀로 우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본인이 슬플 때는 같이 교감해 울어주고, 자신의 의사를 물어주는 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에 같이 속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 대니의 표정 전환은 그 안식처를 얻은 이의 충만감과 무언가 포기한 듯한 감정이 오묘히 조합된 미소로 다가온다.

 

대니에서 '가족'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독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가족은 같은 전통을 공유하는 이들이다.

묘사되는 가족 집단은, 원시적이거나 덜 떨어진 이들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잘 생활하고 있는 이들이지만, 이 전통을 공유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펠레는 뉴욕, 다른 이는 런던에서 생활하며 친구를 사귀고 학위를 따던 이들이다. 그리고 다른 구성원 또한 근친상간이나 예언자에 대해 그 유전적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흔히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이 원시 부족, 혹은 지성적으로 열등한 부족에 대한 프릭 무비였다면 이 영화는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수행하는 현대인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custom하에, 모든 이가 정말 끈끈히 묶여 있다. 누군가의 탄생, 성장, 죽음이 이 전통의 고리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족 집단은 영화 초반에 묘사된 대니의 가족 관계와 놓고 보면 사뭇 다르다. 조울증이 심하다는 동생, 그리고 그와 같이 사는 부모님. 가족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리는 너무 멀었고 대화는 인스타그램과 메일 뿐이다. 사실 진정제를 복용해야 했던 것은 대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대니에게 어느 쪽이 보다 가족 다웠을 까는 확고하고, 단순한 연락이나 혈연이 아닌 풍습(혹은 전통)이 가족을 형성한다는 시각은 영화 나름의 메세지로 다가온다. 

 

 

 

 

4. 결론

신선한 시도가 두 번째로 이어지면, 하나의 기법이 된다. 

그리고 이런 기법은 비교 기준이 명확히 제공되고, 그렇기에 더 뜯어보거나 비판받을 요소가 많아진다.

그래서 '유전' 과는 사뭇 다른 영화 임에도, 묶여 분석 되고 비판되는 점은 태생적 한계이다.

차라리 픽셔널 다큐멘터리 형태로 나왔다면, 감독의 의도가 좀 더 명확하지 않았을까. 영화는 끔찍한 장면을 배제하고 대니의 시각을 따라가야 이해되고, 그렇지 않으면 기괴함이 배치된 느리고 긴 영상으로 남는다.

 

평점은 4 / 10. 덜 주고 싶었지만 북유럽 신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태초의 서리 거인 이미르의 언급이나 룬 문자, 모스크바에서 유사하게 경험한 길고 긴 낮이 매혹적이었다. 더 주기에는 영상은 잔혹하고, 감독의 시선은 지나치게 악랄했다. 다시 말해, 선을 넘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유독 약물 - 성교 - 죽음에 둔감해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도 된다. 물론 지난 뉴스들은 그렇지 않다 말하고 있지만. 

 

다시 말하건데, 연인과 같이 보기엔 적합하지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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