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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 틱... 붐! (tick, tick... Boom!, 2021)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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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꽉찬 포스터. 네이버가 열일 해주었네. 아니, 넷플릭스일까?

 

0. 들어가며

7 / 10

 

서른 살의 스파이더맨도, 서른 살의 극작가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친구에게 추천을 받은 그 순간에 직감했어야 했다.

그 흰 박스 너머로 느껴졌던, 추천의 미사여구 사이에 숨겨진 압정들을. 스파이더맨으로 기억되는 앤드류 가필드가 나오는, 지금 형에게 좋을 영화야. 지금, 나에게? 여기서 이 불안함을 감지하지도, 행간을 읽지도 못한 죄가 아닐까.

 

본론에 앞서 뮤지컬 영화에 대해서는 늘상 관객으로서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고백한다.

극장에서 본들 실제 뮤지컬이 주는 그 여운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혹 한 줌. 그리고 집에서 아무리 모니터를 크게 놓고 본들 스피커가 받쳐주지 않는 물리적 한계 또 하나. 여기에 더해 음악적 재능이 받쳐주지 못해, 결국 음악의 여운보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매번 되돌아가곤 했으니. 결국 아무리 확장되고 규모가 커져도 극단의 보급형 뮤지컬, 혹은 대형 화면에 얹은 뮤직비디오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시선으로 스크린을 쫓게 되는 것이다. 물론 레미제라블(2013) 같은 영화는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이는 고전 소설로도 훌륭했던 탄탄한 골자가 있으니까.

 

그 기나긴 우려를 안고도, 이 영화를 통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야기만이 언어를 넘어 감동을 안겨주는 게 아니구나. 인류가 근원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공포였다. 특히 세월에 대한 공포 또한 언어를 넘어 전달될 수 있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

 

짧게 기록 남겨본다.

 

 

1. 30세는 모두에게 무서운 일이었구나

저 진중한 표정을 보자. 모든 의혹이 풀린다. 노화는 인류의 적이다.

그렇다. 아홉 수에 이은 앞자리의 변화.

나는 이 막연한 막바지의 순간들에 대해, 지극히 동양적인 미신 - 특히 한국적인 문화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이야 모두 같이 해가 바뀌며 나이를 먹기도 하고, 학교나 직장 등 많은 이들이 정형화된 루틴을 공유하다보니,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한 공포감도 묵직하게 울리는 것이다. 소리굽쇠가 공명하는 마냥 19세, 29세, 39세 들끼리 모여서, 이야, 이제 어떡하냐, 우리 다 늙었다. 이런 이야기 나누면 더 침울해지고 그러는 거지.

이런 오해는 해외에 나가 동양 친구들을 만나며 더 강화되었다, 당장 대만쪽의 문화만 해도 생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카운팅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각 나이 먹으면 그래도 서른이라는, 혹은 마흔이라는, 혹은 지천명이라는 그런 시간의 흐름이 순차적으로 밀려오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덜 이슈이지 않을까 하는 작은 오해가 있었는데.

 

이 영화의 초입을 통해 깨달았다. 위의 저 광기어린 표정을 보자. 서른은 그 누구에게나 평등했고, 무서운 일이었다. 자왈 서른에 이립이라더라가 중요한게 아니고, 앞자리가 바뀌고 한 세대를 정의하는 30년이 고스란히 지나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무서운 일인 것이다.

90년대를 그려낸 작품 치고는 도입부의 가사가 놀랍도록 현대 한국을 꿰뚫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부모님 세대는 30대에 대출 낀 부동산, 자동차, 자식 두 명을 낳고 번듯한 직장 또한 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 본인은 그렇지 못하다가 주된 내용인데. 작가의 직업과 통상의 직장인이 다를 순 있겠지만서도, 역시 울림이 깊은 상황 묘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세기가 바뀐다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난리가 났었는데 말야. 당연히 모두가 자릿 수 바뀌는 건 중압감이 있겠지. 이 상황 묘사의 화자가 조나단 본인인 부분에서, 작게 아쉬움은 남는다. 달과 6펜스의 광기어린 예술가도, 직장 생활을 해야하는 사회인의 모습도 둘 다 그려내려 했지만 담지 못한 느낌이라고 할까.

 

2.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난해하다

브런치는 부의 상징인가? 적어도 90년대 뉴요커의 상징이었던듯하다.

결국 조나단의 첫 작품 슈퍼비아는 워크샵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다음 작품을 쓰는 기나긴 고행에 들어간다. 여기서 광기어린 예술가로도, 사회를 치밀하게 살아가는 사회인도 아닌 반발자국씩 겹쳐 사는 예술인으로서의 고뇌,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고뇌는 드문드문 드러난다. 여기서 예술가에 초점을 조금 좁혀가면, 작게 의문이 일렁인다.

 


상업성이 결여된 작품은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술적 가치가 당대에 인정 받지 못할 뿐이지, 어찌 되었건 특정 세대의 사람들에게 선택 받고 찬사 받아야 예술 작품으로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잘 살아남거나 성공한 예술 작품은 종교와 차이가 없다 믿는다. 앞선 사고를 이어가면, 위의 로자의 조언은 예술성의 본질을 꿰뚫는 듯 하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거대하거나 예술적인 작품을 억지로 쓴다기보단, 잘 아는 것에 대해 쓸 것. 그렇게 쓰고나면 누군가 관심 갖고 공감하는 이들이 쌓일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살아남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조언.

그 이후에 메모장에 채워나가는 다음 글감들은 보다 직관적으로 보인다. 시간, 이별, 직장상사 등 보다 많은 질문을 해온 이야기들. 조나단의 답은 한결 어깨에 힘을 빼고 작은 질문을 쫓는 방향으로 돌아온다.

질문들을 보고 작품으로 도출되는 과정을 이 영화, 또는 뮤지컬에 고스란히 담아내려 노력한 느낌이다. 이 연역의 과정은 다른 학문에서도 익히 봐온 감각이다. 그게 논문이냐, 자연과학이냐, 보고서냐, 작품이냐의 사소한 양식과 대상의 차이 아닐까. 

작가는 결국 시대상의 한 단면을 잘라 본인의 문법으로 재편하는 존재구나 싶다. 그렇기에 로자는 다시 옳았다. 성공을 원한다면 사회가 원하는걸 잡아내 그려내거나, 또는 대박 터질때까지 반복해 쓸 수 밖에 없는 거구나. 어떤 때는 소재를 바꾸고, 어떤 때는 문체를 바꾸고. 또 어떤때는 표현 기법이나 예산도 바꿔보고. 다양한 난관 사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건 극히 적으니까. 사회적인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뛰어나야 성공적인 작가가 되겠거니 싶다.



3. 결론.

이런 대사는 사실, 세계 청춘 위원회(WYO) 같은걸 만들어서 허가받고 써야한다 생각한다. 누구맘대로 끝내는거야.

인물을 복잡하게 뜯어내거나, 서사를 한번 더 뜯어낼 여지가 없던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내일 모레 죽는 걸 알고도 오늘 뮤지컬 한편을 더 쓰는 광인보다, 이런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심적으로 큰 지지가 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예술가들은 어딘가 이질적이지 않을까에서, 조금 더 가까워진 극작가의 이야기인 부분은 차별점이라면 차별점 아닐까. 배우의 이미지가 한 몫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봐도 평행세계의 공돌이가 아닐 뿐인 스파이더맨이잖아.

 

틱틱붐에 대한 소개는 영화 내에 표현이 적었거나, 관람하며 놓친걸로 기억한다. 30세의 생일이 다가오며 강박에 의해 그 시계의 틱틱 거리는 소리가 귀에 아른거린다 정도로 문서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한폭탄과 같은 압박감과 대동맥류 하면 역시 셜록홈즈의 주홍빛 연구가 떠오르니 기록에 추가해둔다. 주홍빛 연구만 따로 영화 다시 나와도 좋을텐데.  

 

평점은 7점 정도로 매듭 짓는다.
누구나 닿을 인생의 두려운 지점에 대해 담아냈으나, 초점이 좁은 만큼 한계는 명확한 영화로 닿는다.

어딘가 소울을 볼 때와의 비슷한 감각이다. 뭔가 그러내려고는 하는데, 정작 답지가 명쾌하지 않은 느낌.


본작의 주요한 감정은 지극히 제한적 범주에서 공유된다. 수잔이나 마이크 등의 인물이 독백, 독주를 좀 더 길게 가져가고 옴니버스 구성을 가져왔다면 몰입이 약해졌을까? 조나단에 과도한 초점은 정작 에이즈며 오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타지로 정착하러 가는 다른 인물들의 큰 고뇌를 빛바라게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그 정도로 예술에 대한 몰입감을 갖고 있어 보이진 않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하면 안되는 실수들. 책으로 엮어내면 이 정도로 묶일 내용이 아닐까. 


맺음말로 한 줄 더 이으면, 모두가 예술가일 수는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예술가, 그 중 정체한 이들에게 바치는 기록으로는 이 영화의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다음 1월 1일은 쉽지 않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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