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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Joker, 2019)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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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5 / 10

 

보랏빛이 아닌 조커도 조커였을까.

 

간혹 그런 영화가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을 묘사함에, 내면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여 등장인물과 배우를 동일시하게 만드는 영화들. 

번뜩 머리속에 떠오르는 영화로는 '아이언맨' 시리즈 정도 되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대단한 배우임을 떠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이 절절히 느껴진다. 토니 스타크로서의 감정 변화와 오만함, 통제를 위한 열망, 천재의 분투까지 전달 받는 달까. 아이언맨 3에 와서 드러난 PTSD는 흔한 영웅 이야기의 극복해야할 위험과 약점으로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토니 스타크를 실재하는 인간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일단 핸디캡을 거대하게 안고 시작하는 영화다.

조커라는 인물은 이미 비교대상이 많고 그 내면에 대해 관객으로서 기대하게 만드는 배경이 있다. 악의 카리스마. 배트맨과 대적할 만큼 치밀한 행보와 그에 기반한 굳건한 가치관. 그래서 영화를 감상하며 인물 내면에 대한 추적 중 기대와 결과물 사이에서 충돌이 생기고, 여기서 큰 아쉬움을 느꼈다.

 

두번째 아쉬움은 앞선 아쉬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 다가왔다.

호아킨 피닉스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조커라는 인물의 시련과 그에 따른 극복, 그와 관련된 서사를 어떻게 표현하려곤 했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아서 플렉의 광기를 묘사하기 위한 단편적 재현의 나열으로 나타나고, 영화의 종반으로 나아가며 사건은 진행되지만 내면의 변화는 그에 비해 너무 얕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살인은 거듭 되지만 저마다의 감정선은 큰 차이가 없다. 

결과적으로, '영화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가 연쇄 살인마 아서 플렉을 얼마나 세부적으로 재현해내었나 시험하는 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연기에 대한 찬사는 얼마나 광인을 잘 묘사 했는지로 전락하고, 조커의 재림에 대한 찬사는 나올 수가 없다. 

 

서론이 길었지만, 평점은 5 / 10으로 두고 리뷰를 이어본다.

쿠키 영상은 없었으니 참고하자.

간략히 기록을 남겨본다.

 

 

 

1. 색채로 선선히 묘사되는 아서의 인물상

앞선 조커들을 떠올리면 단박에 떠오르는 색채가 무엇이었을까.

창백한 얼굴, 붉고 기괴한 입술, 혹은 눈가를 맴도는 검정빛?

개인적으로는, 그 깔끔하게 떨어지는 보랏빛이라 생각한다. 이 보랏빛의 정장은 조커에 대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태라는 색채적 감각과 더불어 높고 고귀한 위치에 있다는 인식을 강화시켜준다.

그렇기에 조커의 행위에 대해서 막연한 광기라는 인식보단, 어떤 거대한 의도와 카리스마를 기반으로 행동하고 있다 믿게 해준다. 물론 모든 조커가 그랬던 것은 아니고, 히스레저의 색채가 너무 강렬했기에 대비되는 것도 있다.

 

반면 이번 조커는, 아서 플렉은 철저히 붉다. 의도적이라 느껴질만큼 보랏빛을 배제하고 철저히 그 귀족적인 색채를 벗어낸채 좀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색채로 무장했다. 앞선 작들에서 무수한 악인들을 섭외하고, 포섭하고, 혹은 게임 등의 매체서 바이러스를 생성해내고 무기를 준비하는 그 재력과 여유는 더 이상 없다.

가난한 광인, 아서 플렉은 이 단어로 충분히 묘사가 된다.

 

 

더 익숙해진 히스레저의 조커.

 

빌런의 특성은 초인적인 히어로의 대척점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단순히 미친 악당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들은 초인적인, 초월적인 영웅들 앞에서 너무 쉽게 아스라진다. 그래서 빌런은 천재인데 광기가 깃들거나, 광인인데 천재적 재능을 획득한 이로 흔히 그려지게 된다. 조커 또한 별반 다름이 없다. 여느 화학물질에 빠지던, 혹은 단순한 코미디언으로 시작했건, 그 강렬한 외모로 Why so serious를 읊조리며 경찰을 농락하는 모습들은, 광인과 천재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

 

그러나 이번 조커는, 그 중 철저히 광인에만 초점을 두었다.

영화의 초반부터, 아서 플렉은 본인의 정신질환을 선명히 인식하고, 약을 먹고 상담을 받으며, 양해를 구하는 카드를 들고 다니는 사회적 약자로서 드러난다. 웅대한 빌런의 모습으로 보기엔 너무나 비참한 시작이고 작은 시작으로 느껴지며, 동시에 이 조커가 과연 내가 생각하는 그 카리스마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의 씨앗을 심어준다.

 

영화가 전개되며, 아서 플렉은 행위를 통해 대중을 포섭하는 카리스마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출생의 기원, 광증의 기원을 쫓는 영웅의 탄생설화를 반전 시킨 추적과, 사이 사이 나오는 분노에 찬 웃음들. 그리고 우발적인 살인의 계기를 조합하여 연쇄 살인으로 이어지는 약자의 변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속삭인다. 행복 해지기 위해선, 정신질환자가 아닌 척 할 필요가 없다. 코미디는 주관적이니 내가 웃기 위해선 내가 느끼고 판단하는대로.

그리고 행동한다. 너는 죽어도 된다. 죽을만 하다.

 

이번 조커는 그렇기에 철저히 귀족적 색채,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을 벗어내며 선홍빛의 강렬한 사건과 행위들만을 보여준다.

이를 조커라 불러도 되는가? 는 각 관객마다 다르게 느낄 것으로 생각된다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 영화를 제목을 떼어놓고 보았을 때 영화의 성격은 연쇄 살인마의 일대기로 명확히 드러나고, 우연히 그 이름이 조커일 뿐이다.

물론 영화 주인공의 특성을 분리하고 영화를 보면, 다소 무례할 수 있다. 아이언맨이라는 정체성을 떼어두고 어벤져스를 보면, 의미가 크게 줄지 않던가. 영화를 잘 이해하는 기반 중에 하나는 알려진 주인공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앞선 조커들과 이번 아서 플렉의 연결점이라곤 고담, 웨인과 같은 이름일 뿐이다. 아무리 분리해서 영화를 본들, 이 영화 내에서 아서 플렉을 해석하는 일에 차이가 없고, 그렇기에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본인의 주장과 다르게, 조커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영화는 사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시각적인 자극에 앞선 소리의 압박감

앞선 이야기를 조금 더 기록하기에 앞서, 앞서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깊은 피로감에 잡힌다는 언급을 해주었다. 조조할인이나 심야 영화라서는 아닐 것 같고, 잔혹한 장면은 나오지만 또 다른 잔인한 영화를 고려하면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생각한다.

 

이 피로감의 근원이었던 것은, 철저히 소리가 아니었나 짚으며 음원 활용에 대해 짚어본다.

 

이 영화가 유일하게 만화를 고유하게 잘 해석한 부분이 있다면, 아서 플렉의 웃음 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지에서 묘사되던 조커의 웃음은, 대개는, 그 광대라는 캐릭터에 집중해서 '조소'로 다가온다. 세상 모든 일을 희극으로 치환해버리는 조커 앞에서, 웃음은 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비웃음일 수 밖에 없다. 그 조커들은, 뭐가 그렇게 심각하지? 하고 비웃는 웃음, 그리고 본인 자체의 웃음으로 소리를 꽉 채워준다. 

 

반면 본작의 아서 플렉은, 병적인 웃음에 앞서 웃음에 발성 위치가 다르다. 안면 근육의 수축과 더불어 얕고 바르게 튀어나오는 웃음이 아닌, 저 뱃 속 깊이 어딘가 부터 울려나오는 웃음소리이다. 이 웃음 소리에는 더 이상의 조소나 희극을 보며 나오는 웃음이 아닌, 분노에 찬 소리가 섞여 나온다.

그래서 조금 더 그로울링에 가깝다. 저음으로 시작하며 기괴할만치 크게 들리는 웃음 소리는, 웃음이 아닌 고함치는 것으로 들리며 동시에 관객을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만든다. 동물의 적대적인 울음 소리를 듣고, 긴장이 안될 수는 없잖나.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사운드가 심심하다 싶으면 아서 플렉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맹견 주의라 써진 사육장 안에서 2시간 동안 앉아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여기에 더해 효과음 또한 짧고 강렬하다.

총으로 상징되는 아서 플렉의 행동과, 그의 통제 불가능한 분노에서 나오는 갑작스런 문에 헤딩이라던지. 발로 문을 찬다던지. 이 모든 일은 

탕, 쾅, 퉁. 거리는 크고 짧고 주의를 빼앗는 경고음들을 내어준다. 사이사이에 나오는 인생이 그런 것이다 울리는 노래와, 다시 반복되는 탕, 쾅, 퉁. 그리고 악흐ㅏ흐ㅏ 하는 깊은 아서 플렉의 웃음 소리까지. 

소리의 선택은 치밀하지 못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소리를 사용함에 과도하였고, 관객에게 지속적인 피로감을 안겨준다.

이는 마치 미드 소마를 보며 느껴야 했던 시각적 불편함, 불쾌감, 피로감을 소리로 옮긴 뒤에 지속성을 늘린 느낌이다.

문제는 이 피로감이,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조커라는 캐릭터의 인지도와 작용하며 영화가 몰입감 있었기에 내가 진이 빠졌구나 하는 환상을 관객들에게 심어준다.

 

 

3. 호아킨 피닉스는 본인의 연기를 남겼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윤곽선을 진하게 그려놓은 정물화 같았다.

묘사는 세세하고 하나하나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며, 정신 질환에 대한 묘사. 분노와 공포. 갑작스런 해방감까지 각각의 장면을 정말 강렬히 묘사해냈다.

 

그러나 이는 어딘가 뚜렷하게, 이것은 연기입니다 하는 지워지지 않는 윤곽선이 보인다.

이는 묘사된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이, 너무 다양한 인물적 특성을 요구로 하여 각 장면마다 강조되는 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면은 연속적이지 않고, 장면은 각각 연기되었기에 조커의 재현이 아닌 아서 플렉의 일화들의 재현으로 나타난다. 

각본가가 보는 아서 플렉과 호아킨 피닉스가 보고 있던 조커의 지점이 미묘하게 어긋났던 걸까, 혹은 그 역으로 어긋났나 생각이 든다.

 

위화감의 시작은 눈빛에서 다가온다.

정신질환자로 단발적인 웃음을 조절 못하는 이로 나오는 아서 플렉이, 그 분노가 깃들어 있는 눈빛을 한번씩 보여줄 때마다 괴리감이 느껴진다. 이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에 대해 설명이 되기 전에 나타나면서, 오히려 그의 카리스마를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의 서사는 아서 플렉의 비합리적인 일상들을 다루며, 그가 더 분노하게 만든다. 그리고 앞선 그로울링을 닮은 웃음, 이 강인하게 이글 거리는 눈빛은 마치 이 영화가 아서 플렉이 분노에 가득 찬 일상에서 해방되며, 모든 일을 희극으로 만들고 조소하는 조커로 각성하는 영화인가 기대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카리스마를 관객으로 하여금 목 마르게 하는 눈빛이다. 

 

그런데, 정작 그 변화와 분노의 깊이는 아서 플렉을 해석함에 상이한 특성들을 오가며 설득력을 잃기 시작한다.

아서 플렉을 대뜸 웃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질환자로 묘사됨과 동시에 뭔가 대중의 감각과는 동떨어진 코미디언 지망생으로 묘사되며, 그 사이사이 드러나는 해맑은 웃음과 행복에 찬 눈빛이 조화 되며 기대는 맥 없이 꺾인다. 사실 저 모습이구나. 친구를 죽이는 지점에서 어딘가 공허하고 선이 끊긴 영혼의 전달은 충분히 되었건만, 개인적으로 최악의 지점은 토크쇼에 나가 감정이 격앙된 지점이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조커로 변모가 아닌, 사회적 약자가 드디어 총을 잡았을 때 외치는 절규 뿐이었고 눈빛은 스스로 격앙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느낌. 이는 다크 나이트(2008)에서 해석되었던 조커의 인간의 도덕성을 해체하고 시험하는 그 짖궃은 악성에서 근본적으로 멀다. 상처 입은 동물의 절규와, 다른 이를 휘두르는 호기심이 어떻게 같을까.

영화가 진행되며 아서 플렉은 분노할 이유들이 더 쌓여 나가지만, 눈빛만큼은 시작 장면을 채우던 그 순간보다 더 이상 깊어질 수가 없었다. 

여기서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에 조커의 천재성, 혹은 비범함을 녹여낼까 고민하다 엇갈린게 아닐까. 

 

사실,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가 감량, 내면 연기, 원맨쇼에 가깝게 영화를 채우는 등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였기에, 그 열망과 분노에 찬 눈빛은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본인의 눈빛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현란한 연기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들던 지점은, 매 순간 쉬지 않고 나오는 담배를 피는 장면들.

저 정도의 위태로운 인물이 영화속에서 정작 마약이나 음주에 관한 묘사는 좀처럼 없고, 매 순간 담배를 쉬지 않고 태우는데 그 장면들 만큼은 조커의 일면이 터져 나오는 듯하다. 사실 지나친 흡연에 대한 묘사로 15세 등급은 좀 위험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만은.

 

 

4. 사회의 주류층과 살짝 벗어난 이들

 

인물에서 효과, 배우까지 살짝 둘러봤으니 다시 영화 내용으로 돌아오자.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명확하다. 모조리 아서 플렉의 입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커는 정치적인 의도 없이 광대 분장을 했지만 이 영화는 지극히 사회적인 영화이다.

 

위의 장면은, 어쩌면 아서 플렉을 가장 극적으로 전환 시킨 사건들 중 하나 아닐까. 첫 살인은 아서 플렉을 돌이킬 수 없는 열차에 태웠지만, 위의 연기와 이로 인해 조소 받고 유명해지고 토크쇼에 나오게 된 것은, 고속 열차로 환승한 느낌이다.

앞선 장면에서 조크는 실패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마저 안타깝지 않았을까.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겠노라 올라와서 정작 본인의 웃음에 모든 시선을 소모하는 순간. 웃기지 않고 스스로 웃는 코미디언이라니.

그리고 영화는 이후로 계속 이 지점을 붙잡고 진행된다. 던지는 질문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성공적인 코미디란 존재하나?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영화속에서 성공적인 코미디는 크게 세 갈래로 묘사된다.

일반 서민들 모두가 사랑하는 머레이의 TV쇼. 클럽에서 진행하는 희극 토크의 성적인 농담들. 부유층이 즐기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이 각각의 묘사에서, 아서 플렉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여준다. 머레이의 TV쇼는 대중적이고 그의 어머니도 사랑하는 쇼이며 아서 플렉이 도달하고 싶어하는 지점으로 나타난다. 상상의 무대는 항상 이곳으로 위치한다. 클럽의 농담들은 아서 플렉이 학습하고 병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곳이다. 그의 한 박자 느린 웃음은 전혀 실질적으로 웃지 않고, 노트에 메모하며 학습해야 하는 희극 형태임을 알려준다. 이와 대비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며 부유층과 함께 웃는 아서 플렉의 웃음은, 클럽에서 만큼 다른 이의 주의를 강탈하진 않는다. 

이 제각각의 희극의 형태들은, 아서 플렉의 말을 다시 강조한다.

 

코미디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총을 들고 사람을 죽여보거나, 우발적인 사고로 본인이 죽을 뻔 했던 이에게는 녹녹, 하는 소리 자체가 지극히 희극적인 일이다. 녹녹 다음에 빵인지, 녹녹, 거기 누구세요 인지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이를 세부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면 끝이 없다. 어릴적 어머니와 일화를 설명하는 실패한 조크의 코미디언이 될 뿐. 그러나 지나친 함축은, 녹녹 다음 누구세요 하는 반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머레이 조차도 아서 플렉의 어떤 경험을 구현해낼 수 없고, 그가 그린 웃음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서 플렉은 정신 질환자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 임에도 다르지 않은 척 해야 한다 말했다.

자신의 코미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결코 채울 수 없는 다른 요소들을 느끼게 되고

아서 플렉은 비로소 권위를 강탈해온다.

 

토크쇼에서 총기난사까지 이르며, 전달되는 메세지는 이런 것이 아닐까.

희극은 주관적이다. 어디에 웃고, 어디에 웃지 않고. 어딘가에 성공과 만족감을 느끼고 아니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여기서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켜야할 것은 하나다. 

예의를 갖춰라.

pal, my boy 하며 총을 건네 놓고 저 놈이 구입했어요 하며 팔아먹지 않고, 강도를 당한 근로자의 말을 믿고 사실 확인을 한번이라도 하며, 지나가는 광대와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며 구타할지 말지어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그 희극의 무대를 바꿔 주겠다 이 영화는 말한다. 너 같은 놈들은 죽을 만하며, 말도 안되게 죽고 아스라지는 걸 보며 나는 웃겠다고 아서 플렉은 읊조린다.

 

아서 플렉의 비범함은 이 영화 내내 조명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말하는 조커의 특성은, 지극히 약자였음을 상기하자.

그리고 이 약자들의 꿈에 대한 도전이 TV쇼를 타고 흐르며 모든 이의 조소의 대상, 희극의 요소로 바뀌는 일에 대해 아서 플렉은 경고한다. 너무 무례하다고. Awful하다고 말한다.

 

영화가 사회적으로 위험해지는 지점은, 이 직접적인 비웃음에 대해 경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미래를 설계하는 이들을 대표하는 토마스 웨인이 시위자들과 살해범에 대해 사회적 실패자의 광대짓이라 말하는 것에서 의미는 확장된다. 코미디에 대해 서로 재단하는 것만이 무례한 것이 아닌,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고 판단하며 실패자를 격하하고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라 영화는 경고한다.

그리고 앞선 영화 전개, 서술과 결합하면 지극히 위험한 메세지는 완성된다.

다음 희극의 주제는 누가 될까? 하며 어딘가에서 아서 플렉의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렇기에 영화의 종반에 다다라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들은, 유감스럽게도 조커와 닮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군중으로 뭉쳤으며, 집회를 여는 이들이고 사회적으로 더 나은 삶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을 하는 이들이다. 반면 아서 플렉은 토크쇼에서 스스로 말했잖나,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 TV쇼에 출연한 것도 치밀한 계산과 설계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살인 용의자로 수사망이 조여 오는 와중 우연히 유명해지고 우연히 제의 받은 것 뿐. TV나 영상 매체를 교묘히 다루며 대중을 옥죄는 다크나이트의 조커와는 사뭇 다르고, 그렇기에 이 조커는 배트맨의 상대가 아니라는 확신을 안겨다 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출되어 혼란 속에서 춤을 추는 아서 플렉을 보며, 이 영화는 여기서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저 군중이 아서 플렉을 들어올리며 추대하는 장면은, 아서 플렉 위에 조커라는 캐릭터를 씌우기 위한 뜬금 맞고 과도한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아서 플렉은 대중을 통솔할만큼의 카리스마를 보이지 못했다. 저 대중들 또한 머레이의 TV쇼에서 아서 플렉의 실패한 코미디를 보고 웃었던 이들이지 않을까 생각 되는 마당에.

아서 플렉의 분노의 근원은 천천히, 길게 묘사된 반면 군중의 분노는 묘사가 너무 생략된 나머지, 그 두 가지의 접합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군중의 구성원이 어떤 이들일까 생각해보고, 아서 플렉의 직장내 평가 또한 그리 좋지 않았음을 다시 생각해보면 더 어색해진다. 아서 플렉이 그리는 춤과 그 코미디의 향연에 깊게 매혹되지 않은 이들과 그 사이에 춤추는 조커라니. 한편으로는 웃을 수 있는 장면이다.

 

 

 

5. 결론

영화는 찬사를 주기엔 조커를 묘사함에 색이 옅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연쇄 살인마의 행태를 추적한 영화를 찍은 뒤 조커라 이름 붙인 작품.

 

다만 호아킨 피닉스가 보이는 각 씬에서의 연기는 사람의 인지를 비틀어 가며 시선을 앗아가고,

앞선 소리를 비롯한 관객의 긴장, 피로감을 끌어내는 연출과 겹쳐 영화를 보고 지친 것이 영화에 녹아들었다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소 높은 평점들을 보며, 이 영화가 공감될 수 있는 사회로 심화되어감이 씁쓸하다.

그냥 단순히 사람들의 언행을 보더라도, 에라 잘 모르겠다 하고 망해버리라지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느낌이다.

속된 말로 판 깬다고 하잖은가. 사회가 고착화가 심해지며 판 깨는 걸 그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건 한 편으로 당연하다 싶다만. 여기에 더해 이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이 실패한 이들을 조소하는 건 또 사례가 누적되어가지 않던가. 재벌 3세, 4세의 마약 관련 뉴스와 당당한 행보가 어디 하루 아침 뉴스였나. 아서 플렉의 무례함에 대한 시사는 그렇기에 설득력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 조소 당한 이들에게 다소 직관적인 답을 준다.

 

한편으로 문화적인 자유주의 하에, 이 영화가 상영될 수 있음에는 감사한 일이다.

그래도 15세는 과도하다 생각하고 상업적인 로비가 있었나 의문은 남는다.

 

그리고 이 영화의 아서 플렉은 조커의 시작점을 다뤘다 하기에도 옅다 생각한다.

모든 광인은 천재가 아니고, 아서 플렉이 그 천재성을 보인적도 없는 만큼 배트맨의 반대편에 위치한 조커의 특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카리스마의 부재와 천재성의 부재. 이 두 가지는 조커가 아닌 조커로 칭한 아서 플렉으로 끝나버린다.

 

평점은 5 / 10 으로 매듭 짓는다.

조커라 이름 짓기에는 거리가 있고, 아서라고 이름 지었다면 찾는 이들이 훨씬 줄었을테니.

자칫 제목이 잘못 했다간 아서 플렉 _ 어느 살인자의 일대기 _ 호아킨 피닉스. 이 정도로 구구절절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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