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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우먼 (Una mujer fantastica, A Fantastic Woman, 2017)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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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왜 말하기 어려운 사실은 존재해야 하는걸까, 하는 고민으로 연속되는 이야기

 

6 / 10

 

 

기록에 앞서, 이 영화를 다루기에 난해한 상황이었음을 먼저 남겨둔다.

일단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영화들과는 친숙하지 않다. 감히 기록을 남기기 두렵다.

어릴적 보지 못해 서러웠던 영화는 무슨 무슨 영화제 수상 영화가 아니라, '이퀼리브리엄 (2002)'이었으니까. 상업 영화와 그 표현 기법들은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의 큰 기둥이었고,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예정이다. 아, 판타스틱 우먼(A Fantastic Woman,2017)은 201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 했다고 한다. (칠레 영화다)

 

여기에 더해 퀴어 영화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근래에 접한 퀴어 작품은 문학이 전부이며, 그나마도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되지 못하는 지점에서, 다수의 퀴어 작품들이 맴돌고 있다 생각한다. 영화, 소설,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Politically Correct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연출하며, 앞선 퀴어 작품들의 시사점은 교묘하게 약해져갔다. 

 

 

그렇기에 본 영화를 알게 되고 감상하게 된 이유는 철저히 자주가던 카페에서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전부이다.

A Fantastic Woman, 현실에 없는 환상 속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 짧게 기록해본다.

 

 

1. 왜 환상속에 있는 이어야 할까 - '정의하기' 의 문제 

 

어떤 대상이 실제로 있다고 말하기는 난해하다.

어릴 때 늘상 보던 말 중에는, '사랑' 이 실재하냐 묻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입증했나 생각하면 참 어려웠다. 위치를 말하기도, 모양을 말하기도 모호하다.

결국 가슴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에둘러 말하고, 그래도 설명이 되지 않거든 포옹하며 이게 사랑이란다. 로 설명하는 수 밖에.

 

판타스틱 우먼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 실재로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실 그 어딘가 추상적인 부분은 여성이 아니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져온다. 여기에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도, 공허하게 되돌아온다. 

 

 

- 두 개의 이름은 정말 끈질기게 따라온다

 

작품 상에서 마리나 비달은 끝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다. 마리나. 마리나. 그러나 그를 발목 잡는 것 또한 그 이름에서 비롯된다. 신분증 상의 이름과 자신이 스스로 호칭하는 이름. 그리고 영화의 끝으로 다가서기 전까지, 모두가 마리나 라는 이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내면에는, 단순히 절차적인 문제가 아닌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깊이 부정하는 것과 이어진다. 사실 이 마저도 서술하기 조심스럽다.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정체성이라 쓰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인식의 차이는 이름의 대비로 끈질기게 드러나며, 극의 종반에 차량 납치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름은 참 어려운게, 지금 사회에서는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이 제대로 투영될 수가 없다. 내 것임에도 타인이 더 많이 쓰는 도구인 만큼, 행정처리 상에서, 혹은 타인이 인식하는 선상에서 이름이 생명력을 얻곤한다.

그렇기에 마리나 비달이라는 이름과 그 전의 이름이 충돌하는 것은, 여기 존재하고 있는 마리나라는 여성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앗아간다. 

 

 

- 희석 되어가는 생활

 

사건이 조사 되어가며, 마리나는 의심 받고 성에 대해서 매번 확인되며 일상이 깨져 간다. 근무지에는 수사관이 와서 방해하고, 아파트는 비워달라 강제 되며 개와 자동차 또한 빼앗기고. 끝내 연인의 장례식 마저 오지 말아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어쩌면 여성으로서의 살아왔던 그 기록들이라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오를란도의 연인으로서 존재하던 생활들,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희석되어가며 마리나 비달 이라는 존재는 환상속의 존재로 넘어가버린다.

 

이제 흐려진 마리나라는 여성을 지키는 방법은, 행위 뿐이다.

사랑을 설명하는데 위치와 형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부족하니 행동으로 에두른 것처럼 말이다.

 

 

 

 

 

 

2. 오롯이 행동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상

- 합리적인 오해였을지, 비겁한 매도일지.

 

경찰과 의사, 그리고 다른 수사관은 멍든 자국과 상해를 두고 끝임없이 마리나 비달을 압박한다. 성폭력 관련 사고로 수사를 시도하다 개인의 의사나 적법한 절차 없이, 끝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남성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내면은 남성이 남아 있지 않을까. 이 정신적인 추격전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사람은 정작 애도를 할 시간도 배려받지 못한다.

물론 어딘가의 불편한 점은 있다. 경찰이라면 상해와 갑작스런 죽음, 음주 등의 환경에서 합리적인 의문을 갖는게 아닐까. 그리고 이 불신은 관객과 수사관만 잡아먹는게 아닌, 마리나의 행동을 위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연인으로서 적극적으로 대응치 못하고, 친구에게 전화 걸어 일을 부탁하고 다시 가족들에게 모두 내어주는 행위로, 다시금 오를란도의 연인이라는 정체성은 흐려져 간다. 

 

 

- 자동차, 아파트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

 

전 부인은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이 '부인' 이었고 진정한 사랑을 했으며 문제 없이 살았노라 이야기 하고, 죽음의 애도 이전에 자동차와 아파트에 대해 논의 하자며 전화를 걸어온다. 장례식도 전에.

연인과 여성, 그리고 전 부인이라는 기묘한 개념들이 충돌하며 마리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로 추락한다.   

 

 

- 스트레스 해소는 역시 펀치머신일까

 

감독은 짖궃게도, 이 심리적으로 압박 받는 마리나의 탈출 방법 중 하나로 펀치머신이나 쉐도우 복싱을 드러낸다. 여기서 살짝 멈칫한다. 어, 저런 건 남성적인 행위인가? 먼저 생각이 들고, 다시 생각한다. 여자라고 저렇게 스트레스 안 풀게 있나. 그리고 다시 영화를 보며 엉성한 자세와 터지기 직전의 스트레스 상황을 보며 반성하게 된다. 철저히 아무런 장면이 아니어야 할 텐데. 

이 행동에 대한 교묘한 배치는, 행동으로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 살짝 비껴 짚어낸다. 21세기에 셜록홈즈가 리메이크 되어 여성 탐정으로 등장한 들, 벽에 총질하는 것은 똑같기를 바란 만큼 어리석은 행위이다. 

 

 

결국, 그 끝에 마리나는 성악을 가르쳐준 스승을 찾아가 노래를 다시하고, 오를란도의 환영을 보고 빈 캐비넷을 확인하며 자신을 자각한다.

장례식에 끝내 그 환영을 쫓아 참석해낸 모습에, 마리나가 지켜낸 가치는 무엇 이었을까 다시 고민해본다.

 

 

3. 약간 비틀어 나타낸 묘사들

앞선 다소 정적이고 내용적인 부분 만으로 이 영화는 퀴어 또는 트랜스젠더 문제를 담아내지 않는다. 중간 중간의 묘사에서 좀 더 다양한 시도와 관객의 인식을 찔러보는 장면들이 있다. 

 

- 테이프로 망가뜨려버리는 모습이란

 

오를란도의 재산 문제, 그리고 장례식 참석 문제로 대립이 격화되어감에 따라 끝내 오를란도의 아들은 마리나를 납치해서 멀어지라고 협박한다. 여기서 그들은 테이프로 마리나의 얼굴을 기형적으로 압박하며 감아버리고는, 어딘가에 두고 떠난다.

그들의 마리나에 대한 인식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우리는 어떻게 트랜스젠더들을 생각하나 가감없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그러나 충분했으련지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 보는 마리나는, 자신의 성기가 위치한 부분에 거울을 두며 자신을 돌이켜 본다. 물론 그곳에는 여성의 얼굴이 담겨있는데. 애잔하다에 앞서 복잡한 감정이 든다. 

사실 감독은 마리나의 성을 명확히 안겨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호함이 생기진 않는다. 다만 갖게 되는 것은, 왜 여기서 뭔가 의구심이 생기는걸까, 하는 관객으로서의 죄책감이다. 만약 저기서 여성 성기가 드러나는 장면이 나왔던들, 관객과 오를란도의 가족들은 연인으로서 예우하고 인정하고 대우해줬을까? 

젠더라는 개념이 발달함에 따라,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은 충분 해야만 함에도 어딘가 복잡한 감정을 여실히 안겨준다.

 

- 인생의 비참함은 역시 바람 아닐까

 

작게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이 모든 상황이 첩첩이 쌓여감에 따라 마리나의 심리묘사는 위 장면과 같이 드러난다. 앞선 관객의 인식을 비틀며 짚어내는 연출 들과 대조 하듯 직관적으로 전달해 기억에 남는 장면.

 

 

 

4. 결론

앞서 퀴어 작품에 대해서 어딘가 맴도는 지점이 있다고 언급했다.

일상이 깨지며, 성소수자로서 박탈되는 삶을 드러내고 이를 회복하는 장면.

 

이 영화의 마리나 비달에게 있어, 신분 조회와 연인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 자발적인 아우팅은 끝임없는 족쇄가 되어 삶에 얽혀온다. 그리고 끝에는 노래와 장례식, 가족과의 대치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회복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래서 차별과 구분 없이 대하자는 기조가 사회에 정착된다고 믿을 때, 이 영화의 시사점은 어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말 어떤 개인이 모든 이에게 차별없이 대하고 보편적 사랑을 가질 때에, 이 영화는 우연한 사건으로 얽힌 치정극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그렇기에 감독은 집요하게 영화 사이사이 너도 혹시 그런 선입견을 갖진 않았니, 하며 확인하는 장면을 삽입해두었다. 어떤 개인이 갖는 보편적 인류애가 의심받을 수 있도록.

이는 감독의 연출 구상이 뛰어나다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악의와 다름 없다 생각한다. 물론 이게 현실과 유사하다면, 여기서 영화는 다시 가치를 회복할 것이다. 

 

 

평점은 6 / 10.

이 영화가 더 입소문을 타고 인지도를 쌓아갈수록, 그 사회는 보다 바뀔점이 많다는 것을 보여줄까봐 아쉽고 두렵다.

반면 마리나라는 개인에 여성이라는 성 인식, 혹은 단순한 인간으로서의 인식이 확고하면 할수록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게 다가온다.

 

연인과 보기에는... 글쎄. 

영화 좋아하는 친구랑 보기에도... 글쎄.

보고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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