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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The Flash, 2023)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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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6 / 10

 

익숙한 맛의 토마토 스파게티. 신상 파스타라 써놔도 맛이 같은걸 어떡해.

 

 

한동안 영화를 보고선 글 쓰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만큼 청량한 영화가 나오기 어려운 시기 였음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경제 호황기의 영화와 불황기의 영화에는 그 문체가 달라진다.

그리고 대개는, 돈이 모이는 장소와 시간에 보다 풍부한 서사가 담길 수 있다.

 

담긴다 보다는 허용된다는 감각이 맞다고 본다.

하나의 장면, 하나의 씬에서도 제작자와 제작사, 투자자가 조금 더 너그러워지지 않나.

다급할 때 나오기 쉬운 성공 또는 생존 공식들을 떠올려보자. 좀 유명한 배우들 골라서 등장 시켜, PPL 보여줘야지, 지금은 벤츠 마크... 가 아니라 나무 사이로 빛이 갈라지는 간격을 담아내고, 로봇의 작은 변신 시간에도 훨신 공을 들여 세밀한 혈관과도 같은 배선을 보여줄 수 있게 되고 그러는거지. 연출가에게 원하는 심상을 표현하게 하고, 디테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시대가 분명 어느 순간에는 있어왔다.

 

지금은 그런 관용의 시대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좀 더 익숙한 로봇의 디자인, 익숙한 캐릭터들, 이미 검증된 서사와 줄거리.

한 장면, 한 씬에서도 철저히 검증한 시선이 느껴지고, 서사도 그렇고. 배우를 고르는 시선은.. 쉽지 않네. 배우의 행동까지 통제할 순 없으니 말야.

 

 

사람들이 너그러워질 수 없는 시기에, 살아남는 전략은 개성의 강조가 아닌 정형화와 원가 절감이다.

참기름을 곁들여 육회를 올린 냉채 토마토 파스타 같은게 아니라, 일단 빨간 소스를 적절히 데워낸 토마토 베이스의 그것을 얹고 푸실리나 펜네 보다는 적당한 스파게티나 링귀네 정도를 고른뒤, 파마산 치즈 정도 갈아내면 거뜬한 것이다.

예측 가능한 맛을,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그래야만 어라, 운 좋게 반응이 좋을거야, 성공할 수 있어하는 기대감와 추산, 맹신이 아닌

아, 이 정도 영화면 몇 좌석 확보 가능하고, 배우 코스트 생각했을 때 이 정도 제작비는 나올거고. 아, PPL 몇개 넣어서 메꾸면 생존은 할 수 있겠네 하는거지. 기획과 기획에는 미묘한 간극이 있기 마련이고, 오늘날의 슈퍼 히어로 영화는 그 기획사이의 간극에 놓여있다.

 

짧게 기록 이어본다.

이후 내용은 스포일러가 조금 녹아있다.

 

 

 

1. 솔직히 난 18세의 베리도 좋았지만, 어쨌든 성장은 해야지

저 힙한 무게중심을 봐라. 오른다리부터 정수리까지 올곧게 바로 서있다. 사실 유권 계통의 자연체에 달한게 아닐까. 카포에라 달인은 헛된 소리가 아니었어

빠른 말과 생각, 그리고 눈 깜짝하면 끝나있는 행동.

플래시의 두려운 이미지는, 어딘가 긱해보이고 예측할 수 없는, 통제불가능한 천재성의 이미지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선 사고 방식이야 다른 빌런, 히어로들도 충분하니까. 보다 근원적인 무서움은, 다른 이들은 관측하고 대비를 할 시간이라도 있지만 플래시는 이미 저질러 놓은 다른 시간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어찌나 빠른지, 아무리 브루스가 경고를 해도 혼자 저 긴 시간을 거꾸로 돌아가버렸으니. 생각도, 그에 대응하는 행동도 빠르니, 타인의 피드백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바로 결과가 다가와있다.

 

이 답답함, 무서움, 예측할 수 없음. 본작의 플래시는 비로소 본인이 평범한 인간이 되고서야, 그 두려움을 여실히 느낀다. 눈깜짝했더니 도심이 불타있고,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좋을 18세의 자신은 사방팔방으로 사라져있다. 미래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대면하기 보다는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것처럼 보여지는게, 괜한 기분이었을까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중간중간 미래의 플래시가 젊은 플래시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적합한 해설이나 트레이닝을 미처하지 못하고 답답해하고 분노하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 아, 저게 금쪽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겠구나 생각도 들고. 아무리 맞춰서 행동하려 하도 어떻게, 이미 무언가 터져있는걸.

 

그리고 영웅이 갖는 독선과 분노 또한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도입부의 샌드위치 가게 점원에게는 저 느림에 답답해하는 반면 다시 영웅들을 만나면 협조적이고 고분고분해진다던지. 과거의 자신에게는 생략과 지시로 일관하는 반면 베트맨에게는 또 존중과 순응하는 모습을 표한다던지. 그 여느 히어로 영화보다도, 부모-자식 관계가 다양하게 변주되며 육아스러운 성장기가 엿보인다.

영화의 절반을 관통하는 관념. 이런 감각이다.

 

 

2. 이름을 바꿔도 결국 파스타긴 하다

 

본 작품이 위와 같은 젊은 부모와 자식과 같은 감각을 통한 내적 성장기로 나름의 서사를 쌓아올리긴 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갈 곳 잃은 시선이 느껴진다.

플래시가 조금은 성장한 거 같고.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하지?

예전의 단편 영화를 위한 서사들이었다면야, 능력을 희생하고 부모를 되살리는 선택을 한다던지, 타락한 자신을 죽이고 쌍소멸한다던지, 그 교훈에 걸맞은 비극과 희생을 안겨주겠지만. 오늘날은 더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다. 살려야 다음 이야기를 찍지. 겨우 배우 이미지 정착시켜놨는데, 어떻게 뜯어고쳐.

 

그렇게 돌아온 이야기는, 아차, 나 파스타 먹으러왔었지 하며 허망하게 높여있는 내 앞의 토마토 파스타 같은 식은 느낌의 서사로 돌아온다.

스마트폰도 잘 안보이는 옛 시대의 베트맨이 와서는 멀티버스는 각각 과거선이 있는 곧은 파스타 면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도, 돌이켜야하는 서사를 만들기 위해 슈퍼걸과 배트맨의 죽음이 재연출되는 장면들도. 무언가 방향성이 공허한 느낌이다.

멋지게 나온 것 치고는... 쉽지 않은 결말.

플래시는 정말 과거에 알던 이들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새로 마주한 슈퍼걸과 배트맨에게 전우애라 해야하나, 동료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까? 과거에 슈퍼맨이 결국 사건을 해결했다면 왜 이번에는 슈퍼걸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지 않았지? 그런 의문에 한번 빠지면 영화의 서사와 감정선이 불일치하는게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극단적으로는 과거 엄마의 토마토 캔을 몰래 올려 시간선으로 돌아가는 판단의 시기도, 차라리 좀 더 나중 시점이 낫지 않았나? 새로운 영웅들과의 전투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가족이 어느순간 뒷배경이 된 느낌이다.

 

솔직히 신발에 자꾸 눈이 간다.

무수히 동료의 죽음을 막고자 사건을 되풀이 하는 행위의 문제, 그 본질을 과거의 자신 및 미래의 자신과 삼자대면 하며 자각하게는 하지만, 그 결말도 어처구니 없이 감시카메라에 아버지의 얼굴이 담기도록 캔의 배열을 바꾸는 것으로 이어진다. 엄마가 잊은 토마토 소스를 챙겨줘서 죽음을 막은 것과 무슨 차이야.

 

 

만약 무수한 되감기의 시도들 속에서 매번 소중한 부모님의 죽음을 재차 마주하고, 이를 막지 못한 절망감으로 본인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 정도로 밍밍한 맛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마산 치즈, 치킨 스톡의 시대를 살고 있다. 왜 수 시간씩 깊게 진국과 신파를 우려내겠어. 조미료를 적당히 써서 제 시간 내에 원하는 서사를 그려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되감기의 대상 또한 방금 마주한 새 슈퍼걸과 새 배트맨. 궁극적인 문제도 필연이 아닌 멀티버스의 충돌. 교훈을 주고 받는 대상도 미래에서 온 본인이 희생하는게 아닌 과거의 배리와 미래의 배리의 쌍소멸. 사카린으로 인한 단맛도 단맛이라지만, 이만큼 끓여도 남지 않는 단맛이 있을까.

 

얻은 교훈이 없는 절제되지 않는 힘. 결국 배트맨의 서사는 한번 더 다시 쓰이며 영화는 혼란한 미래를 암시하며 끝이 난다.

 

 

 

 

3. 결론. 

 

어찌되었건 관객이 먹을만한 요리는 나왔다고 생각한다.

플래시의 비주얼이나 캐릭터성을 묘사하는 것도 좋았고, 슈퍼걸도 서사가 많진 않았지만 기대하게 되는 부분도 생기고, 배트맨이야 뭐, 배트카보고 솔직히 탄성이 나왔지. 마이클 키튼이 자기 팔을 기워내는 장면을 보며, 노병이 죽을 자리를 찾는 듯한 비장감도 엿보였다.

 

 

최종적인 소감은 이래저래 오삼불고기는 맛있잖아와 같은 감각이다.

서프 앤 터프를 한국적으로 해석한 요리입니다 하고 걸어두면 한껏 기대하게 되지만, 기대 대비 아쉬울 뿐이지 맛은 있으니까.

플래시도 DC의 새로운 시작이니, 멀티버스의 혁신이니 뭐니 하면 한껏 기대하게 되지만, 아 그 타임 패러독스. 아 그 멀티버스. 아 그 큰 힘에는 큰 책임 이런 느낌이 남을 수 밖에 없긴하다.

 

그리고 사이사이 엿보이는, 사업적 안정감에 대한 의지도 엿보인다. 벤츠 PPL이나, 어디서 자주본듯한 비행기에서 오토바이 떨어지는 구도라던지. 게임 연출에서 본 것 같은 슈퍼걸의 콤비네이션 히트와 씬의 구도 등. 좋은게 좋은거지 뭐.

 

평점은 그래도 나가서 그럭저럭 볼만 했다는 감각의 6점 정도를 남긴다.

날이 더운 만큼, 쾌적한 영화관의 체험비용과 DC의 명맥을 쫓아가는 추적의 여정. 그래도 아껴줄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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