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by 2023. 1. 13. 18:24

 

혹성탈출 시절의 포스터 감각. 묘하게 서늘한 웃음이 보이는 듯하다.

0. 들어가며

 

원인을 모르는 규율을 깨고 나면, 항상 가족간의 소통 문제로 돌아오더라.

 

6 / 10

 

지난 연말의 혼란함을 이기지 못해 넷플릭스를 결재, 아니 결제해버린지 벌써 1달이 다 지나간다.

쓰고보니 빨리 구독 취소해야하는데.  

그렇게 이왕 1달, 혹은 이대로 가면 두 달 구독하게 된 김에 틈틈히 매력있어보이는 영화를 찾아보던 중, 마침내 하나를 찾아버렸다.

아, 언젠가 이름 들어본 거 같은 제목의 영화, Raw. 영화 제목도 뭔가 함축이 많아보인다.

 

구글에서 찾을 수 있는 영화 설명. 넷플릭스의 설명도 비슷했다.

날 것 먹고는 뭔가 크게 탈이 나서 하나씩 복수를 시작하나? 

감히 수의사가 날고기를 먹게 해? 수의대의 숨은 치부인 날 것 먹기 동호회를 파헤쳐나가는 대목인가? 삶이 크게 바뀐다는게 설마 먹은 고기에 몸이 동화되어 반인 반수라도 되는건가?

 

 

이런 부푼 기대들을 안고 영화를 틀자 깨달았다.

프렌치-벨기움이다. 프랑스 영화에서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를 기대하면 안되는 것을 과거 수차례 배웠건만, 너무 약하게 생각해버린 것이다. 저 대륙건너 광활한 토지와 다인종 다문화가 융합된 용광로의 쇳물을, 고작 위와 같은 빈약한 상상력과 플롯으로 로튼 토마토 93%와 유수한 상을 타낸다고? 얕고 옅은 판단이었다.

 

 

요새 그래도 챙겨보게 되는 평단의 찬사 / 작가주의 / 어워드 수상 영화들. 넷플릭스의 마지막 보루다. 잠깐 대만넘어왔더니 보이는 중국어 제목은 덤.

 

짧게 영화에 대한 기록을 남겨본다.

영화를 추론 가능한 스포일러들은 여실히 실릴 수 밖에 없으니 이후 내용은 조심스럽게 읽기를 바라고,

참, 네이버 영화 검색을 하면 보다 직관적인 설명이 있어 스포일러에 준하니 유의하자.

아무도 안볼거라고 기대했나.

 

 

네이버에는 영화 사진이 몇개 없다. 무슨일이지.

 

1. 어떻게 하는게 맞았었나, 끊임없는 되물음

 

이 영화는 초장부터 쉬이 납득 되지 않는 부분으로 시작한다.

언니는 왜 가족 전체가 채식주의자라는 동생의 말을 증명해주지 않고, 토끼 콩팥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날것으로 먹게 동생을 내밀었나. 잠깐 겁쟁이로 보이는게 뭐 대순가 싶었는데 말이지. 영화의 중반에 큰 비밀이 밝혀지고서야 그 내면이 읽힌다. 별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던 언니 Alexia가, 혹시 동생이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망의 희망을 걸고 내민 것이었다. 콩팥을, 그리고 식인 욕구를.

 

이후 동생인 Justine이 우발적으로 잘린 자신의 손가락을 먹어치우자, 동생을 전보다 싫어하고 밀어내는게 아니라 바로 생존 전략을 알려준다. 영화의 첫 장면의 배경. 인적이 드물고 큰 가로수가 있어 시야 확보가 어려운 곳에서, 우발적으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작게 포식하는 것. 

 

생각보다 무는 연기가 리얼한데, 지금 보니 진짜 물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건치들이시네.

 

영화는 이 정없는 듯 냉혹해보이는 언니 Alexia가, 비로소 동생에게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보여주며 쌓여온 질문을 가속해서 풀어낸다. 

딸 둘 키우기는 힘들다 하는 아버지의 쓸쓸한 읊조림, 그 너머에 다시 들리는 한번 사람 맛을 본 개는 죽여야 한다는 손가락 사건 이후의 대화. 여기에 앞서 수의대라는 배경과 동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Justine을 생각하면, 과연 한 번 사람을 먹기 시작한 두 자매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조치해야하는가 다시 되묻게 되는 장면이다.

물론 그 중 하나의 대답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본인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고를 일으켜 죽어가는 사람을 섭취하면서.

 

누가봐도 좀비 영화의 한장면.

가족의 서사와 식인행위가 안겨주는 고민을 살짝 밀어놓고 보아도, 곁들어지는 이야기 또한 녹록치 않다.

자유로움을 표방할법한 국가에서 정작 신입생들에게 닿는 엄격하고 강제적인 신고식, 개중에는 식중독을 일으킬지도 모를 토끼간 먹기부터, 선배가 지나가면 눈깔아 까지 이어지는 짙은 군대의 향기. 벨기에 영화라고 생각하면 납득 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성적인 문화까지 강요하는 신입생 환영회의 연속과 게이인 룸메이트, 그러나 이러려고 커밍아웃도 안하고 살아온게 아니라는 공허한 외침 등. 

 

포스터들의 Justine이 보여주는 공허한 눈빛이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요약해주듯,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제약을 풀어내자 살아온 방식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건들만 벌어진다. 

 

 

2. 가능한 시각적으로, 그리고 시각 너머의 끈적한 질감

서사의 이 켜켜이 쌓인 느끼한 라자냐스러운 감각을 들어내면, 이 영화는 그럼에도 왜 영화로서 신박한가 되묻게 되는 지점이 있다.

어딘가 불쾌한데, 끔찍해서 눈을 찡그리거나 가리고 넘어가면 되지 않나.

그럼에도 그 너머의 무언가가 있기에 영화를 멈출까, 말까 하다 억지로 넘어가게 되는 셰프의 킥이 있는 것이다.

 

이 감각의 원인은 개인적으로는.. 시각, 특히 질감을 시각적으로 담아낸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을 광기가 엿보인다고 할까.

PPL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배우를 막 굴리는 영화가 근래 미국과 한국에서 가능했던가 하면, 내가 요즘 영화를 안보긴했지.

토끼 콩팥을 먹은 직후의 피부질환의 묘사는 강렬한 예시다. 알러지 반응마냥 피부가 딱딱하게 굳고, 또 긁어내고. 표피가 하얗게 굳어 떨어지고 들어내는 장면. 이 영화는 대체 무엇이지, 이대로 변신하나 하는 의문을 안겨줌과 동시에 영화가 어느 지점을 강렬하게 휘어잡을 것인지 전달하는 대목이었다.

 

사실 그보다 신입 환영회의 직후, 페인트인지 동물의 생피인지 모를 끈적한 액체를 머리위에 뿌리는 것도. 이후 이런 페인트를 반복해 사용하며, 씻겨지지 않는 불편한 질감을 색채를 비롯한 시각적 요소에 녹여낸 느낌이다.

그 질감의 정점은, 자매의 아버지가 마지막에 드러내는 자신의 먹히고 난 흉터뿐인 살갗. 그리고 룸메이트인 Adrien의 창백하게 식은 주검의 질감 아니었을까.

지금 보니 미국을 정말 사랑하던 영화. 그러나 프랑스의 매운맛을 곁들였다면 또 달랐겠지

근래 어쩌다 보니 본즈앤올을 봤다보니, 보다 시각적인 요소가 주는 전달력이 강하게 대비되어 인식된 것도 있긴 하겠지.

본즈앤올은.. 좀 더 소리가 강렬한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시각, 시각 너머로 담아내려하는 질감이 강력하다.

 

 

3. 결론

 

처음에는 부모님의 잘못 아닌가 싶었다.

성인 되기 전에 진솔한 가족 대화 한번하고, 이러이러 하니 채식만 하든지 선을 넘고 알아서 살든지 하고 말은 해줬어야지. 

하지만 Alexia나 Justine의 행동을 보니 채식주의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먼저 설명했다면, 호기심에 직접 선을 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깊은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교육과 교화로 과연 동물과 사람이 구분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이들이 사람을 먹는게, 도입부의 원숭이의 강간담론, 그리고 퀵의 안락사를 판단하던과 차이는 무엇일까.

아버지 쪽에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던 공포심 어린 눈빛도 비로소 다시 보인다. 눈 앞의 존재가, 동일한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한탄하는 것이다. 절반만큼 본인을 닮았기에. 

 

교육에 있어 선택과 집중을 해서 얻은 성공 사례. 그러나 쉽지 않다.

영화를 이렇게 가족, 가정의 기능으로 초점 맞추고 질문하면 늑대아이나 이누야샤...(?)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한데, 형제자매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생각해보면 수리남.. 이 아니라 태극기 휘날리며.. 이것도 좀 아니네. 어렵다. 이래저래 가정의 기능은 참, 어려운 대목이다.

저 상황에 몰리고도 굳건한 신뢰관계를 구축한 자매는 가족의 순기능이자 성공한 사례인가? 역시 사람은 비밀을 공유해야 친해진다더니, 자기손가락 하나 정도는 고민조차 안하는 Alexia의 대범함을 다시 눈여겨 볼 법 하다. 셋쇼마루도 한 팔 정도는 그냥 내줬잖아. 역시 이누야샤는 대단한 작품이었어.

 

지금보니 본즈앤올의 가정환경과 반대편 어딘가에 머무른 느낌이다. 가족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서사가 이렇게 바뀔 순 있겠네. 채식주의 가풍이라니, 그럴듯 했다. 

 

영화 관람에 대한 전체적인 감각을 한 마디로 뱉어본다면, "프랑스 놈들은 쉽지 않구나" 정도 생각든다.

프랑스 영화가 간간히 빠른 대사나 기존의 동양 끝자락에 살짝 걸친 나의 사고관을 부수는 영화적 요소, 혹은 연애관에서 갖은 당혹스러움을 안겨주곤 했는데. 이건 좀 더 매콤하다. 아니, 매콤보다는 질감이 불쾌하다.

평점은 이 묘한 감각을 버티지 못해서 6정도로 마무리 지어본다. 이정도면 서사의 수긍과 매혹의 여부를 묻기 이전에, 호불호의 영역이다.

 

손가락 마술의 한장면과 같다. 그런데 손가락 개수는 멀쩡하네. 증거는 10개, 답은 하나.

영화에 사용된 소재나 서사적인 사건이 얽힌게 많다고 해야하나, 다소 산만한 토픽의 난입도 적응이 쉽지 않았다.

진득한 하나의 서사를 듣기보다 사촌동생의 충격적인 고민에 대한 수다를 잔뜩 한 느낌이다.

 

가족과 자매, 수의대의 불합리, 혹은 식인충동, 혹은 게이인 룸메이트와 갑자기 그 행위 중 마주했을 때의 고찰, 그런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되었네, 죽어가는 시체 확보와 뒤처리 등등 주제 2~3개를 선별해서 굵게 얽혀낼 법도 했을텐데. 이런일도 있고 저런일도 있었는데 지금 어떡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언니는 감옥 갔고 엄마가 범인인가 하는, 그런 막연한 결론의 장황한 수다였다.

 

이 정도의 수다를 떨면서 할 수 있는건 공감의 액션 뿐이지만, 발걸음을 돌리고 나니 찝찝하다. 앞선 질감이, 보다 끈적하게 뇌리에 남아서 그런게 아닐까. 어쩌면 등을 돌리고 나면 잡아 먹히지 않나 싶은 불안감도 한몫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