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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Glass Onion: A Knives Out Mystery, 2022) 리뷰

Traby 2022. 12. 26. 00:09

 

 

0. 들어가며

 

7 / 10

 

어떤 추리소설은 하나의 매끄러운 희곡일 수 있다.

 

 

넷플릭스를 질러버렸다.

한동안 보지 않고 구독하지 않던 이력을 쌓아오고 있었다.

반년 정도된거 같은데, 자본주의의 최전선 유튜브 프리미엄에도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만, 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데에는 또 넷플릭스만한게 없지. 정작 구매는 크리스마스가 끝난 26일에 했다는건 또 작은 함정이다.

넷플릭스의 결제 배경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정보들이 배치되어있다. 웬즈데이 같은 시리즈물이야 궁금은 한데, 또 막상 시리즈물을 집중도가 밀려서 보지 않고. 옴니버스와 같은 기예르모 델토로의 작품들은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유튜브 리뷰영상을 먼저 봐버렸다. 불릿트레인은..저번에 네이버 시리즈에서 구매해서 봐버렸는데. 에잇.

그럼에도 머잖아 외계인 1부와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의 작품들이 추가될거라는 이야기에 사전 답사하는 셈 치고는 어찌저지 이용권을 다시 구매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열심히 보고 기록할 일 밖에.  

 

그리고 상기 포스터의 하단에 써진바와 같이, 23일에 따끈한 작품이 업로드되었다.

킹받는 캡틴 아메리카가 떠오르는 나이브스 아웃의 후속작, 액션을 빼고 어딘가 익살맞은 영국 탐정으로 돌아온 제임스 본드까지. 

나이브스 아웃의 후속작, 글래스 아웃은 한번 봐둘만 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일렁임.

 

짧게 기록해본다.

스포일러는.. 필연적으로 포함되지만, 이번작은 자제토록 노력해봐야겠다.

거 왜, 셜록홈즈 '마지막 사건'에 범인은 모리아티다 하는 정도는 다들 그러려니 하고 수긍해줘도,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읽으며 범인은 누구다 하면 산통깨는 거잖아.

 

 

1. 탐정이 위치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머리와 어깨 사이에 머리가 하나씩은 들어갈거 같다. 사실 바티스타를 제외하면, 물리적으로 제압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탐정이 어떻게, 왜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하며 영화를 보면 흥미가 가중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전작의 벤와 블랑이라는 캐릭터도 상당히 잊었고 영화 내용도 잊어가던 차에, 영화의 종반에 다다르자 어라, 이거 그런 캐릭터였지 참,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와닿았다.

이건 1편이다. 아나 디

전작과 본작을 잇는 유일한 인물은 유감스럽게도 아나 데 아르마스가 아닌 제임스 본드다. 

반대로, 그 저명한 탐정이 여기에, 어떻게, 왜 존재하는가는 매력적인으로 다시 다가온다.

 

 

2. 그리고 탐정들이 하는 행위란 다 그렇지.

 

벤와 블랑이라는 탐정의 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좀 더 실용적인 사실의 재단 이라고 서술할 만 하다.

옆동네 코난을 잠시 본다. 이정도면 삼백안아닌가? 안경을 둥근 뿔테로 바꿔보는건 어땠을까.

진실은 하나라는 코난의 대사에는,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내면 탐정의 역할은 끝난다는 강인한 도덕의식이 서려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안겨주는 강력한 사회적 규범이라는 이미지. 그 너머의 진실이라는 절대선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코난은 어찌보면 하나의 종교인과 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때로는 광신도와 같이 트랜스 상태로 축구공을 쏘아낸다.

그렇다. 이것이 현대의 성전이자 사자왕의 무용담이고 영웅담인 것이다. 과학지상주의, 지성주의, 진실은 오직 하나, 관측가능한 명제의 모음이 사실이다 등등.

 

그러나 과연, 진실은 있는 그대로 묘사함이 타당하고 합당할까? 그 결과에 대해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코난이 진실을 남의 목소리를 빌려 덤덤히 읊조리며, 타인의 비극과 살인사건을 자신의 추억으로 풀어내는 것을 방관하고 있어야하나. 미란이한테 언제 진실을 말할 거야 , 당장 본인은. 타인의 사실관계만 그 상처와 저변을 헤아리지 못하고 헤짚어 내는 지점에서, 코난의 정의관은 자기만족적이고 기만적인 행태를 보인다.

 

 

반면 저 머나먼 섬에서 고독한 싸움끝에 해탈한 007은, 때로는 사실을 공개함에 사람을 재배치하고 시간을 재구성하는 연출을 가미해서, 보다 도덕적인 선택이 무엇인가 하는 교훈을 안겨준다. 40~50대의 열혈 스파이가, 마침내 박애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역시 영국 신사는 다르구나.

물론 저 실용주의에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 있긴하다. 개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진실을 찾아내고자 의뢰인을 위험한 선택을 하도록 압박하고, 더 큰 위험으로 유도하는 대목이 셜록홈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뭐, 영국 탐정끼리는 통하는게 있나보지. 정작 감독은 미국인인데? 쉽지 않다. 벤와 블랑은 또 그와중에 프랑스 느낌 물씬 나는 이름이다. 뭐야 이게. 

 

 

3. 결론.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도 빼어났다. 저 목의 각도를 봐라. 이게 연기로 가능한 경지인것인가?

코난에게는 없고 벤와 블랑에게는 있는, 그 도덕적인 판단은 보다 고결한 무언가가 있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다. 

아니면 독선인거지.

라이언 존슨 네 이놈, 스타워즈는 여느 독선에 태워서 보내버리고 탐정 영화는 흥미롭게 뽑아낸 것일까.

스타워즈의 포스가 함께하길 정도는 그 공감대에서 벗어난 것이었나. 차라리 팰퍼틴 스핀오프 영화라도 감독 맡지 그랬어.

 

본 영화에서 남성인권주의 운동에 대한 완만한 풍자나, 빅테크 CEO들에 대한 풍자는 적절하게 매력적이다. 아, 코로나 시국에 프라이빗 파티를 즐기러 나온 시의원도 만만치 않다. 사실 바티스타가 조깅할때 가슴이 자꾸 신경쓰인다. 이 글을 보고 영화를 보는 사람도, 아, 여기가 그 대목이구나 하고 직감이 오게 될 것이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요는, 이 매력적인 풍자를 탐정이라는 인물에 투사시키며, 매력적인 희곡 한 작품이 나온 느낌이다.

영화의 템포, 대사의 강약은 마치 여느 연극을 보는듯한 운율감이 있다.

 

반면 추리, 탐정 서사로서의 기대는 사실 관계가 교묘히 재배치 되어있고 극적인 연출을 꾀하다 보니,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 즈음에서는 적절한 타협을 하긴 해야한다. 사실 탐정 소설 읽더라도 추리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공평히 배치될 순 없잖아.

한편의 희곡을 감상하는 듯한 편안함 감각으로, 이제는 몸으로 구르지 않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안락한 미소를 보며 함께 즐기면 이 영화는 연휴의 한 조각을 성큼 삼켜내버린다. 

 

평점은 7점 정도로 기록을 마무리 짓는다.

생각보다 편안하게 머리 비우고 보기 좋아서 하나, 의외로 바티스타의 배역과 전달력이 매력적이라서 가산점 둘.

옆동네 드렉스를 연기하는 건 너무 실없어 보이는 개그라 차마 따라가지 못했는데, 본작에서는 어느 정도 납득되는 선으로 전달이 된다.

다음 작에는 이제 토마신 멕켄지 정도 나와주려나. 

 

아, 영화 전반의 기만적이고 묘한 요소는 다시 봐둘만 하다.

굳이 마일스 브론의 기만 뿐 아니라, 각각 등장인물들의 어설픈 모습들을 되짚어보면 마지막에 조각이 끼워 맞춰진다.

진실은 하나인가? 하나일지도. 코난도 막 틀리지는 않았어. 우선순위가 다를뿐이지.